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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새 길은 걸어간 뒤에야 보인다
김연수 소설가 2021년 01월호


아마도 아주 맑은 여름날이었으리라. 나는 어느 시인과 함께 북한산 능선에서 바위를 붙잡고 낑낑대고 있었다. 그 무렵 나는 재개발되기 전, 수많은 사람이 모여 살던 정릉4동에 살고 있었다. 그 시인의 집에 놀러 갔다가 북악스카이웨이와 같은 고도에서 생활한다는 점에 반해 구한 방이었다. 가깝게 살게 되면서 그에게 자주 놀러 갔다.
한번은 슬리퍼를 끌고 놀러 갔더니 또 다른 선배 시인과 대동문에서 만나기로 했다며 나더러 같이 가자는 것이었다. 그가 하도 대수롭지 않게 말하기에 대동문이 동대문 같은 것인 줄 알았다. 그래서 슬리퍼를 끌고 그 시인을 따라나섰다.
그런데 뭔가 좀 이상했다. 동대문 같은 것이라면 언덕 아래로 내려가 버스를 타야만 할 텐데, 그는 정릉초 옆으로 난 산길로 올라가는 것이었다. 그럼 뒷동산의 정자 같은 곳인가 보다 생각했다. 그러나 곧 가파른 능선이 나왔다. 여기가 어디냐고 물었더니 그가 대답했다. 칼바위 능선이라고.
나는 막 제대한 대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복학생으로 캠퍼스에 들어서니 모든 게 달라보였다. 나 역시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학교생활, 그러니까 이제 취업을 목표로 하는 공부를 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러자니 입대 전부터 써온 시들이 마음에 걸렸다. 복학생다운 비장한 심정으로 한 시절을 기념하겠다며 그 시들을 프린트해 한 문예지에 투고했다. 그런데 그만 덜컥 당선되고 말았다. 잔뜩 사놓은 토익, 토플책을 보면서 웃어야 할지 울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시인이 됐다고 해서 바뀌는 건 하나도 없었다. 누군가 나를 시인이라고 소개하면, 다들 멸종동물을 바라보듯이 했다. 시인이라는 건 명예직이지 직업이 될 수 없다는 걸 금방 눈치챘다. 그렇다고 시인이 된 마당에 토익책을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해서 밤마다 조금씩 뭔가를 썼는데, 그렇다면 시를 써야만 했는데, 신이 나서 써보니까 소설이 됐다. 그것도 1천 매가 넘는 장편소설이었다. 그렇게 대학교 3학년이 반이나 지나가고 있었다. 굳이 칼바위 능선을 붙잡고 위태롭게 매달려 있지 않아도 인생 자체가 칼바위였다.
대동문은 칼바위 능선에서도 한참 가야 나왔다. 그날, 우리는 대동문 근처의 그늘 아래에 신문지를 깔고 앉은 선배 시인 가족을 보자마자 물부터 달라고 했다. 갈증이 가셔지니 배가 고팠다. 그러자 선배 시인의 부인이 우리를 위해 남겨놓은 김밥을 내놓았다. 지금도 잊을 수 없는, 정말 맛있는 김밥이었다. 가야 할 곳이 어딘지도 모르고 무작정 따라나선 길, 그게 혹시 내 인생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무작정 이렇게 따라가도 좋을까? 그럼 나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김밥을 먹으며 그런 생각을 하는데, 신문의 1면에 인쇄된 공고가 눈에 들어왔다. ‘장편소설 공모, 상금은 1억 원’이라고 적혀 있었다. 나는 김밥을 씹어먹으며 다른 사람들 몰래 그 공고를 찢어 셔츠 주머니에 넣었다. 그렇게 여름의 나무 그늘에서 심신을 달래고 북한산에서 내려왔다. 그날이었을까, 그 다음 날이었을까. 아마도 나는 셔츠 주머니에 넣어둔 그 공고를 꺼냈을 것이다. 이제 나는 글을 쓰며 살아가리라, 마음먹으며. 비록 그 공모에는 뽑히지 못했지만, 그 이후론 실패까지도 내겐 더없이 소중한 경험이 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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