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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의 문장들
함께 슬퍼하는 마음에 관해서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1년 01월호


출판사 제철소에서 펴내는 ‘일하는 마음’ 시리즈는 한 해를 열면서 읽기에 더없이 좋은 책들이다. 그동안 『출판하는 마음』, 『문학하는 마음』, 『다큐하는 마음』, 『미술하는 마음』 이렇게 네 권이 나왔다. 한 분야에 걸쳐진 다양한 포지션의 사람들의 목소리를 고루 담은 인터뷰집이어서 때로는 콘텐츠 창작자의 말에서 어떤 인사이트를 얻기도 하고 때로는 실무자의 말에서 어떤 노하우를 얻기도 한다. 내가 하는 일과 전혀 관련 없는 분야에 관한 책이어도 얻어갈 마음이 많다. 결국 사람이 하는 일이란 다른 듯해도 비슷하고 써야 하는 감각들은 다 통해 있으니까. 오히려 전혀 관련 없는 낯선 곳에 서서 내가 하는 일을 바라봤을 때 더 도드라지게 잘 보이는 것도 있다.
그중에서 『다큐하는 마음』이 조금 각별한 건 나에게 ‘일하는 마음’에 더해 지금 내가 발을 딛고 있는 이 땅에서 한 사람으로서 ‘품고 살아가야 할 마음’에 관해서도 다시 돌아보게 만들어서일 것이다. 사실 나는 다큐멘터리를 열심히 챙겨보는 관객은 아니다. 그 이름이 내 귀에까지 흘러들어 올 정도로 유명한 다큐멘터리만 간간이 볼 뿐이었다. 하지만 볼 때마다, 그저 정보값과 짤막한 슬픈 단상의 형태로 나를 스쳐 지나가며 ‘바깥세상의 일’로 존재하던 일들을 내 마음속에 구체적인 아픔으로 던져 넣어 ‘우리의 일’로 바꿔버리는 다큐멘터리의 힘에, 이 지독한 작업을 해내고야 마는 다큐멘터리스트들의 힘에, 아연한 존경과 부채감 섞인 다짐을 안고 돌아서곤 했다.
짧아도 2년, 길면 5년 넘게 이어지는 지난한 시간을 ‘알바’ 등으로 작업비를 근근이 감당하면서 이주노동자, 해고노동자, 난민, 성소수자, 세월호 유족 등 이 사회의 약한 고리들 곁에 함께 머무르며 숨겨진 이야기들을 기록하고 세상에 내보이는 이 질기고 뜨거운 『다큐하는 마음』 앞에서, 저자 양희 작가의 표현을 빌면, “세상의 온갖 여린 것, 보드라운 것, 나약한 것, 힘없는 것을 사랑하고 지지하는 일”을 내 자리에서 어떻게 해나갈 것인지를 진지하게 고민하지 않기란 거의 불가능하다. 누군가의 문제가 내 안으로 들어와 나를 끊임없이 괴롭히고 불편하게 만들 때, 그래서 이제 그 괴로움을 해소하려면 그 문제를 같이 해결하는 수밖에 없을 때, 그때 비로소 ‘우리의 이야기’가 시작된다는 간단하지만 무거운 사실을, 책 속 열 명의 다큐멘터리스트의 목소리를 들으며 새삼 생각한다.

나는 본다. 타인의 삶에서 눈길을 떼지 못하고 다큐멘터리를 제작하는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이 기록한 세상을 보고 함께 울어주는 사람들을. 이 ‘주고받음’ 속에서 우리는 서로에게 가슴을 열게 될 것이다. 오로지 ‘나’만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라 나를 넘어선 타자, 그리고 우리를 보게 되는 아름다운 경험. 그것이 다큐멘터리다. p.17
증거 없는 기억은 증명될 수 없고, 기록 없는 기억은 망각으로 이어진다는 사실이다. 개인을 기억하기 위해서든, 사건을 증언하기 위해서든 힘없는 자들에게 기록은 절실했다. p.162


한 해를 이 책으로 시작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 올해는 나의 겹과 타인의 겹을 겹겹이 겹쳐 우리의 이야기로 만드는 일에 좀 더 용감해지고 싶다. 그 이야기를 나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기억하고 싶다. 함께 슬퍼하고 정확하게 분노하는 일에 동참하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라도 다큐멘터리를 부지런히 보러 다니기로 결심했다. 다큐멘터리에 전혀 관심이 없는 사람들도 이 책만큼은 꼭 읽어봤으면 좋겠다. 책을 덮을 때쯤에는 단단해진 마음을 느낄 수 있을 테니까. ‘다큐하는 마음’은 어쩌면 ‘단단해지는 마음’일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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