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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씨앗
맘충이 만들어지는 한 조각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2021년 01월호


결혼하고 13년 동안 오직 ‘나 한 명을 위해’ 아내가 식사를 별도로 준비하는 일은 없었다. 이건 당연한 것인데, 결혼한 남자만이 이런 소릴 하면서 으쓱댄다. 누군 억울하다고, 누군 자신의 배려하는 마음 알아달라며 자기 밥 자기가 챙겨 먹는 걸 굳이 언급한다. 그러니 전혀 자랑할 내용도 아니지만, 내가 가끔 우리 집의 식사원칙을 강하게 말하는 순간이 있다. 남편의 시간대에 맞춰 아내가 밥을 차리는 걸 그저 서로를 위하는 마음을 넘어 마치 자연적 질서인 것처럼 여기는 사람들과 마주할 때다. ‘여자 역할’ 운운하면서 이를 화목한 가정을 위한 전제로 삼거나 혹은 그 자체를 사랑의 증거처럼 해석하는 사람들에게 난 웃기지 말라면서 ‘아내가 정성스레 차려주는 식사’ 따위의 말은 사라져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인다. 이때, 십중팔구는 아내가 일하는지를 묻는다. 아니라고 하면 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비슷한 뉘앙스의 답이 등장한다. “아내가 집에서 놀면서 밥도 안 차려줘?”
가사노동을 ‘놀이’로 해석하는 무례함은 여기저기서 부유한다. 아내가 아이를 어린이집에 보내자 “그 시간에 뭐해?”라고 추궁하는 사람이 늘어났다. 이들은 ‘별 특별한 거 없다’는 대답을 기다렸다는 듯이 물고 늘어진다. 아직 놀고 있냐고, 혹은 아무것도 안 하면서 애는 왜 안 보냐고 빈정거린다. 아내가 경력단절을 끊고 일을 시작하자 달라진 생활패턴으로 몇 번 아팠는데 가까운 사람이 이런 소릴 했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안 하고 집에서 놀았으니 힘들 만하지.”
일부 남성들의 구태의연한 언어습관으로 치부할 수도 있겠지만, 아내가 밥도 안 준다는 남자의 토로에 ‘전업주부라면’ 해야 한다는 의무론을 설파하는 여성들을 발견하는 건 어렵지 않다. 이들은 여자니까 당연하다는 논리는 아니지만, ‘집에 있으면’이란 변수를 ‘한가하다’로 해석하며 전통적 성별 분업을 유지시킨다. 그럴 수밖에 없는 배경은 무수하다. 육아와 일이라는 두 마리 토끼를 잡았다는 워킹맘들의 고군분투가 담긴 글들에는 ‘집에 놀고만 있을 수 없어서’, ‘더 이상 퍼져서 살 순 없다고 결심하고’, ‘애들에게 당당한 엄마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등등 전업주부의 상태를 결핍이자 탈출해야 하는 것으로 보는 시선이 가득하다.
자신의 치열함을 도드라지게 보이려다가 어떤 사람을 나태하다고 규정하면 되겠는가. 그런 씨앗들이 무럭무럭 자라면 차별의 열매가 주렁주렁 열린다. 예를 들어 ‘대낮에 할 일도 없이 카페에서 수다나 떠는’ 식의 혐오표현이 누굴 가리키는지는 선명하다. 카페에서는 누구나 이야기를 주고받고, 또 그 이야기들은 싱거운 경우가 많지만 ‘전업주부처럼 보이는 여성’이라면 매우 부정적으로 각인된다. 이 경험이 누적되면 어떤 사람의 진상행동을 그 인간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남편이 뼈 빠지게 고생해서 벌어온 돈을 흥청망청 쓰는’ 여자들의 일반적인 모습이 확인된 것이라 여긴다. ‘맘충’이란 단어가 불쑥불쑥 등장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차별은 일상 속의 평범한 이야기에서 형성된 ‘그럴 만한 근거’를 연료 삼아 맹렬히 전진한다. 가부장적 질서 속에서 여성들은 ‘태초부터 차별받아도 되는’ 존재로 회자되며 살았다. 그리고 현대사회의 자기계발 패러다임은 알파걸이니, 슈퍼맘이니 등의 단어로 일부 성공사례를 화려하게 포장해 마치 성불평등이 종식된 느낌을 자아내더니 여성들 내부를 세상에 도전한 자와 현실에 안주한 자로 구분해버렸다. 이 경계선에 익숙해진 사람들은 어떤 워킹맘의 아주 예외적인 상황을 ‘애 키운다고 투덜거리는 보통 여자들하고는 다르다’고 해석한다. 이 상상을 가능케 하는 추임새들이 모이면, 전업주부는 ‘집에서 빈둥빈둥 노는’ 보편적인 이미지에 갇혀 혐오받아도 마땅한 사람이 돼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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