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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단맛 꽉 찬 겨울 배추의 마력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탐식생활』 저자, 콘텐츠 에이전시 ‘포르테’ 대표 2021년 01월호


난리가 났다. 오늘 밤 당장 ‘은성보쌈’에 가지 않고서는 잠들 수 없을 것만 같은 열병이 덮쳤다. 먹고 싶은 것은 꼭 먹어야 하는 집요함은 나의 MBTI 검사(성격유형검사) 결과에도 명시돼 있다. 온몸이 은성보쌈을 입에 넣으라고 소리를 지르고 발을 쾅쾅 구른다.

보쌈의 마력은 다름 아닌 김치에
은성보쌈은 서울 성동구 금남시장에 있는 오래된 보쌈 전문점. 삼겹보쌈과 은성보쌈 두 가지가 대표 메뉴다. 은성보쌈은 앞다릿살을 쓴다. 부들부들한 삼겹살이냐 쫀득쫀득한 앞다릿살이냐. 고르기 힘들다면 섞어보쌈이라는 간편한 선택지도 있다.
돼지고기를 삶은 실력이야 말할 것도 없다. 살코기는 적당히 말캉하면서 비계는 부드럽기 이를 데 없다. 몇 번 씹지 않아도 육질은 부드럽게 풀어지고, 고소한 맛이 입안에 가득 차며 황홀경을 자아낸다. 식어도 맛이 좋은 이 절묘한 수육 삶기 실력은 뭇 보쌈집 중 상위에 드는 곳들이라면 응당 그쯤이야 매일 해내는 바다.
꼭 은성보쌈이어야 하는 난리의 근원은 수육보다는 독보적인 김치에 있다. 은성보쌈에선 푹 익힌 김장김치 스타일이 아니라 갓 살짝 익혀 먹기 좋은 김치가 보쌈 접시만 한 접시에 수북이 쌓여 나온다. 주방 한쪽에서 항상 여봐란듯이 무채 양념 듬뿍 무치고 있는 이 김치는 그야말로 보쌈만을 위해 태어난 김치. 굴과 낙지 등이 슬쩍 들어간 새빨간 김치는 과하게 짜거나 불필요하게 시큼하지 않아 마치 샐러드처럼 보쌈에 듬뿍 곁들이기 좋다. 알밤 등 고소한 맛까지 더해 먹는 내내 즐겁다.
개성 있는 맛의 균형에 그 절대성이 있다. 어지간하면 다른 보쌈으로도 갈음될 것이, 그 독보적인 맛 덕분에 꼭 은성보쌈이어야만 하는 열병을 낳는다. 바로 나부끼듯 달콤한 맛이다. 김치치고 꽤 단 편이긴 한데, 기분 좋은 단맛이다. 묵직하고 부담스럽게 들큼한 것이 아니라 날아갈 듯 가볍게 미각의 성층권에 구름처럼 떠올라 연기처럼 사라지는 단맛. 보드라운 고기 한입에 김치 듬뿍 얹어 먹다 보면 어느새 고기 추가, 김치 추가를 외치게 된다.
게다가 이 계절의 은성보쌈엔 또 하나의 열병 바이러스가 있다. 선도 좋은 굴이 추가 메뉴로 있는 것이다. 겨울이 들면 굴에도 향이 진하게 밴다. 김치에 들어 있는 굴을 눈치 보며 골라 먹는 대신 듬뿍 원껏 얹어 한입에 넣으면 더할 나위가 없다.
초겨울의 풍속 중 김장이 있다. 코로나19가 제아무리 맹위를 떨쳐도 김장하는 집은 김장은 해야 하기에, 기온이 뚝뚝 떨어지던 초겨울 내내 나는 주변인들의 김장 잔치 풍경에 시달렸다. 김치를 사 먹고 얻어먹는 우리 집은 김장을 하지 않은 지 오래됐고, 낄 만한 김장 잔치의 기회도 마땅히 없었다. 고통받는 김장 노동자들이여, 부디 너그럽게 받아들여 달라. 그런 덕분에(!) 나에겐 남들 모두 진저리를 치는 김장 풍경이 중노동의 고난 주간이 아니라 맛의 제전으로 각인돼 있다. 김장에 도움 하나 되지 않는 미약한 어린아이였을 때가 평생 마지막 김장이었으니까.
잘 절인 김장 배추를 쭉 찢어 양념 한 줌 올려 입에 넣어주던 것을 받아먹던 맛이 오랜 기억 속 김장의 맛이다. 짭짤하게 간을 잡아 꼬들꼬들하게 절인 배추. 젓갈의 쿰쿰한 짠 내에 단맛 짠맛 아린 맛 매콤한 맛이 죄다 성글게 얽혀 있던 미성숙의 김치 양념. 그 교묘한 조화의 한 입 말미엔 숨겨져 있던 김장 배추의 단맛이 확 밀려왔다. 그 비밀스러운 단맛에 이끌려 한 입만 더, 한 입만 더 하며 받아먹곤 했다. 그러다 보면 아이 몰래 넣은 서해 굴이 입안에 들어와 질색할 때도 있었고, 수육이 다 삶아지면 작은 배가 불룩해질 때까지 김장하는 날의 만찬이 이어졌다.
요는, 배추다. 김장철 배추는 위험할 정도로 맛있다. 여린 봄배추나 여름의 푸석한 배추, 때를 서둘러 어설픈 가을배추로는 대체할 수 없다. 초겨울이야말로 배추의 맑은 단맛이 단단한 조직 안에 가득 찬 최고의 시기다. 무르익은 배추의 맛을 한껏 즐기기 위해 은성보쌈의 먹기 좋은 달곰한 김치를, 어느 김장 잔치에고 못 이기는 척 초대받아 김칫소 듬뿍 얹은 절인 배추를 잔뜩 먹고 싶은 것이다. 열병의 본체는 결국 배추다.

긴급 처방, 알배추
난리는 났는데 하필 은성보쌈이 휴무일이던 날, 나는 자가 응급처치를 시행했다. 항정살은 전자레인지용 찜기를 이용해 속성으로 수육을 만든다. 항정살은 속살 사이사이 지방이 풍부해 전자레인지에 10분 정도 돌리면 금세 촉촉한 수육을 만들 수 있다. 여열로 항정살 수육이 마저 익는 동안 알배추 절반을 찬물에 씻어 담아내고, 토하젓 한 큰술을 푹 떠서 곁들인다. 토하젓은 가격은 좀 비싸도 특유의 묵직한 감칠맛과 쌉싸래함이 있어 항정살 수육과 날배추에 최고로 잘 어울린다.
별 손 간 데 없는 간단한 조합이지만 식탁에는 광명이 비추고 기적이 행해진다. 이 계절엔 알배추 정도만 돼도 부드러운 줄기부터 여린 잎사귀까지 죄다 고소하고 달콤한 수분이 꽉 차 있어 무척 흡족하다. 이 치유의 식탁에서 알배추 반 통에 항정살 한 팩을 순식간에 먹어 치우면 그날 밤만은 은성보쌈 김치 꿈 따위 더 이상 꾸지 않고 꿀잠을 잘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개운한 컨디션으로 은성보쌈에 갔더라는 후일담. 응급조치가 근본적인 치료는 될 수 없으니, 당연히 먹고야 말았다. 섞어보쌈에 굴 추가, 고기 추가, 김치 추가를 먹고서야 비로소 나는 초겨울마다 앓는 ‘급성 배추 당김 증후군에 의한 난리 병’을 완치했다.
그렇게 맛의 절기를 하나하나 열병 같은 난리 속에 챙겨 먹고 보내는 것. 그 총합이 내겐 세월이고, 결국 인생이다.
인생이 무고하기만 하다면 참 좋으련만, 아무래도 배추 다음으로는 무 병이 날 것만 같다. 무말랭이를 하지 않고도 단단하게 잘 여문 겨울 제주산 무의 달콤한 맛! 아작아작 갈라지는 질감! 그리고 엄동설한에 천천히 익힌 동치미 한 사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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