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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맛의 캔버스, 무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탐식생활』 저자, 콘텐츠 에이전시 ‘포르테’ 대표 2021년 02월호


‘오뎅바’라는 단어만 떠올려도 몸이 후끈해진다. 머리가 지끈거릴 정도로 추운 날, 미끄러지는 길을 안간힘을 쓰며 걷다 보면 김이 서려 안이 보이지도 않을 정도로 새하얀 미닫이문 앞에 절로 멈춰 서게 된다. 아귀가 잘 맞지 않아 드드드?드르륵 하는 소리를 내며 열리는 문을 열면 가득한 사람들. 뭉게뭉게 김이 피어오르는 오뎅바에 열기와 대화와 단란함이 가득하다.
바르고 고운 말, ‘어묵’이라고 써서는 그 정취가 도무지 살지 않는다. ‘짜장면’과 ‘자장면’처럼 결국은 오뎅도 어묵과 공식적인 피아구분을 할 수 있게 되길 바라며 다시 오뎅바 이야기를 이어나간다.
서울 강남구 신사동의 가로수길이 갓 떠오르는 핫 플레이스였을 때, 알게 모르게 그 거리의 붐에 일조했던 오뎅바 ‘정든집’이 딱 그랬다. 모두 낮 동안엔 세상 멋 다 부리는 척 하면서도 결국은 저녁마다 그 허름하고 소박한 술집에 모여들었다. 한동안 엄청난 유행이어서 동네마다 생겨났던 오뎅바 형태의 술집들이 모두 그렇게 추운 겨울, 도저히 지나칠 수 없는 온기로 발길을 끌었다. 유행과 관계없어진 지금도 오뎅바는 군데군데서 명맥을 이으며 겨울을 덥혀주고 있다.
내가 오뎅바에서 가장 좋아하는 메뉴는 다름 아닌 무다. 무는 본디 하얀 캔버스와도 같은 것. 제 몸에 있던 시원한 단맛과 입에 착착 붙는 감칠맛을 국물로 모두 내준다는 면에서 흰 칠을 두껍게 한 캔버스와 같다. 흰 바탕 위로 다른 재료와 양념, 간이 모두 어우러진 복잡미묘한 맛을 다시 채운다는 점에서 희게 비어 있는 캔버스와 같다. 새우, 오징어, 당근 등 갖가지 부재료로 맛을 낸 여러 종류의 오뎅부터 소 힘줄(쓰지), 곤약, 유부 주머니에 떡까지 한데서 끓고 있는 오뎅바 냄비 속의 무는 유별나게 맛날 수밖에 없다.
모락모락 김을 내며 은은하게 끓고 있는 오뎅국물에서 큼직한 무를 건져내는 모습만 봐도 두근거린다. 오뎅의 기름진 맛, 담백한 풍미, 간장의 짜릿한 향까지 모두 속에 품은 오뎅바의 무. 더군다나 오뎅바에서는 그 맛난 무를 원하는 만큼 먹을 수가 있다. 일반 술집의 오뎅탕 한 그릇에 들어가는 무의 분량은 정해져 있기 마련이라 더 달랄 수도 없는 노릇이지만 오뎅바에선 골라 먹기가 가능하다. “일단 무 두 개”로 한겨울 한기를 맛있게 녹이곤 했다.

겨울의 멋진 맛 동무, 제주 무
무는 사시사철 한식 밥상에 빠지지 않는 일상 작물이지만, 겨울 무는 특별히 맛이 좋다. ‘제주 무’라고 이름 붙은 특별한 무가 유통되기 때문이다. 몇백 원 더 비싼데 틀림없이 그 값을 한다.
무는 원래 서늘한 기후를 좋아하는 작물이다. 가을바람 정도의 시원한 땅에서 천천히 몸집을 불려가는 것이 무의 본성이다. 그러다 보니 여름엔 고랭지에서 무를 키울 필요가 있었는데, 무도 품종마다 좋아하는 기후와 재배 시기가 다르다 보니 고랭지용 무 품종이 따로 있었다. 이것을 제주에서도 시험 삼아 겨울에 키워본 것이 본격적인 제주 겨울 무 재배의 시작이라나. 고랭지에서 여름에 키운 것보다 제주에서 겨울에 키운 고랭지용 무가 더 맛이 좋아 현재에 이르러 제주의 겨울엔 무가 넘쳐나게 됐다는 것이다.
당시 자리 잡은 품종은 ‘멋진맛동무’. 이름 한번 귀엽고 적절하다. 그야말로 멋지고, 맛도 좋으니까. 12월께부터 나오기 시작하는 제주 무는 무엇보다도 조직이 치밀하다. 마치 총각무나 순무처럼 단단한 식감이 일품이다. 맛은 일반 무와도, 총각무와도, 순무와도 비교할 수 없이 달다. 서늘한 날씨에 천천히 단맛이 차올라 그렇다. 아린 맛은 덜하고 짭짤한 감칠맛도 좋아 생으로 먹어도 끝도 없이 입맛을 당긴다. 요리에 쓸 무를 썰면서 집어 먹다가 배가 다 차버리는 일도 왕왕 있다.

겨울이 맛있는 이유
제주 무를 날것으로 다 먹지 않고 요리에 쓰면 조미료도 따로 필요 없이 뭘 해놔도 맛이 산다. 우선 기본 반찬인 무나물. 여러 방법이 있겠지만 겨울철마다 수시로 무나물을 해서 먹다 보니 간편하면서도 맛은 잘 사는 방법을 찾아냈다. 채를 썬 무를 굵은 소금에 절여 물기가 빠진 그대로 짠 물까지 함께 끓이는 것이 나의 요령이다. 들기름과 마늘 조금, 생강즙이나 분말만 좀 넣고 무가 투명해지도록 익히면 간단히 완성. 고두밥에 듬뿍 얹어 먹으면 다른 반찬도 필요 없다. 무밥과 비슷한 것 같지만 꼬들꼬들하게 지은 밥에 촉촉한 무나물을 비벼 먹는 것은 또 다른 얘기다.
무밥을 짓는 것은 통통한 굴이 냉장고에 있을 때다. 통영 굴은 가장 흔하지만 팔도의 굴 중 가장 크리미한 맛을 갖고 있어 가열용으로 즐겨 쓴다. 겨울에 제주 무와 굴로 솥 밥을 지어 매콤짭짤한 양념장을 살살 둘러 먹으면 한겨울 맛을 알짜만 골라 한 상에서 다 보는 셈이다. 굴의 시원하면서도 짙은 바다 향과 무의 달보드레한 감칠맛이 잘 어우러진다. 굴을 넣은 뭇국도 같은 맥락이다. 무와 굴이 가장 맛있는 계절이 우연히도 같은 겨울이라는 자연의 섭리에 감사할 지경이다. 나박나박 썰어 금방 익혀 먹는 굴깍두기를 담가둬도 겨우내 요긴한 반찬이 된다. 굴소스처럼 진한 감칠맛이 밴 깍두기는 삼겹살과도 궁합이 기가 막힌다.
기온이 영하 10도가 되는 것이 어떤 의미로도 달가운 일은 아니지만 동치미를 담가놓기엔 더없이 맞춤한 온도다. 짠물에 삭힌 고추와 함께 꾹 눌러 담아놓고 잊고 있으면 동장군이 알아서 새콤하게 잘 익은 동치미를 만들어놓는다. 숙성에 좀 더 시간이 걸리지만 이렇게 천천히 익은 동치미가 더 깊은 맛을 낸다.
무의 단맛과 가열했을 때 얻어지는 짙은 감칠맛은 아무래도 조림이나 국물 요리에 가장 어울린다. 앞서 이야기한 오뎅탕의 무가 대표적인 예다. 음식 한 그릇의 맛과 향을 스펀지처럼 빨아들인 무는 그 자체로 주인공이요, 별미가 된다.
무를 듬뿍 넣은 고등어조림이나 코다리조림도, 북엇국이나 갈비찜이나 갈비탕도 빼놓을 수 없겠지만 가장 백미로 꼽는 것은 심정적으로 제사 탕국이다. 지역마다 탕국 재료가 다르게 들어간다는 것은 뒤늦게 알게 됐지만, 내가 맛을 들인 것은 아무래도 남쪽 지방의 집안 레시피다. 나는 이 탕국을 무척 좋아해서, 제사를 도맡았던 큰외삼촌 댁에 간다고 하면 탕국 맛부터 떠올리곤 입맛부터 다셨다.
손톱만 하게 썬 무는 결코 주인공 행세를 하지 않는다. 소고기뿐 아니라 새우 살과 홍합 살, 오징어 살도 균일한 크기로 듬뿍 들어간다. 두부도 그 음전한 크기로 풍족하게 들어간다. 소고기와 무에서 우러나는 육지의 깊은 맛, 해물로부터 얻어진 바다의 화려한 맛이 만난다. 바다와 육지 사이를 잇는 것은 또다시 순백의 캔버스, 무다. 이질적인 맛과 향을 지닌 재료들을 한데 어우러지게 하면서, 각각의 개성은 또 살려낸다.
해마다 겨울이 되면 제주 무를 쟁여 놓고 이것저것 만들어 먹는다. 유독 큰외숙모의 탕국만은 따라잡지 못한다. 재료를 바꿔봐도, 국간장을 얻어와 봐도 번번이 실패다. 명절 밥상을 차려내던 며느리의 마음은, 미안한지 고마운지 알 수 없는 그 노고로 낸 맛만은 결코 따라 할 수 없는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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