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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서른의 시, 삶을 긍정하다
최지인 시인 2021년 04월호



내겐 ‘서른 살 형’이 하나 있다. 서른 살 형은 연극배우였다. 열아홉 살 때 그 형이 있는 극단에서 두 달가량 잡일을 도왔다. ‘아시바(발판)’ 위에 올라가 조명을 달거나 무대를 조립하고 해체했다. 어느 날은 야외 샤워장을 만들어야 했다. 각재(角材)를 못으로 고정해 어설프게나마 겨우 모양을 잡았다. 해껏 일한 보람이 있었다. 그날 저녁 서른 살 형이 차를 몰고 나를 데리러 왔다. 숙소까지는 십 분 정도 걸렸다. 형이 대뜸 올해 서른이 됐다며 말했다.
“서른이면 성공한 배우가 돼 있을 줄 알았어. 사랑하는 사람과 가정도 꾸리고 차도 한 대, 집도 한 채 있을 줄 알았어. 그런데 나는 지금 무명 배우고 가정은커녕 애인도 없고 차도 집도 없어. 너도 금방이야. 놀지 말고 열심히 해서 꼭 성공해.”
다음 날 저녁 서른 살 형은 야외무대에 섰다. <오구>에서 ‘저승사자 2’를 맡았다. 우스꽝스러운 바지를 입고 춤추고 노래했다. 나는 무대 뒤에서 형을 지켜봤다. 형은 땀을 뻘뻘 흘리며 마음을 다해 연기했다. 객석에서 박수가 터져 나왔다.
서른 살 형의 말은 내가 지쳐서 쓰러질 때마다 나를 일으켜 세웠다. ‘서른 살 형처럼은 되지 말아야지’ 생각했던 것 같다. 무명이 아니라 유명의 삶을 살고 싶었다. 성공이 뭔지도 모른 채 성공하고 싶었다. 시를 잘 쓰고 싶었고 하루빨리 등단하고 싶었고 많은 잡지에 작품을 발표하고 싶었고 좋은 출판사에서 시집을 내고 싶었다. 이것이 성공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 안다. 시를 잘 쓰는 것보다 좋은 시를 쓰는 게 중요하다는 것과 사랑받는 시인이 되는 것보다 좋은 사람이 되는 게 중요하다는 것을 이제 안다.
아빠가 서른이었을 때 나는 네 살이었다. 아빠는 열심히 일했다. 방방곡곡 다니며 돈을 벌었다. 아빠에게 성공은 돈이었을 것이다. 아들이 자신의 꿈을 이어받길 원했다. 실패한 꿈을 아들이 실현해 주길 간절히 바랐다. 그런데 아들은 시를 썼고 둘의 사이는 점점 소원해졌다.
증명하고 싶었다. 굶어 죽지도 않고 가난하지도 않은, 시 쓰는 삶을 말이다. 대학을 졸업하고 시를 계속 쓰기 위해서 취직했다. 차도 사고 집도 얻고 결혼도 해서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부모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어떠한 삶이든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것이라면 그 삶은 불행하다. 나는 스스로 불행한 삶에 나를 던져버린 것 같다.
어느 날 아빠가 말했다. 악기 하나쯤은 다룰 줄 알아야 한다고. 아빠도 대학 때 드럼을 쳤었고, 대학가요제에도 나갔었다고. 이제 그 말이 거짓말이라는 걸 안다. 아빠는 악기 같은 걸 배울 수 있는, 먹고살 만한 가정에서 자라지 않았다. 나는 종종 무대에서 드럼 치는 아빠 모습을 상상했다. 드럼 스틱을 마구 두드리는 아빠가 수많은 조명 아래서 땀 흘리고 있다.
시는 대개 삶이다. 가끔 투쟁이고 종종 아무것도 아니다. 나는 아무것도 아닌 시를 많이도 쓴 것 같다. 내게 확신이 없어서 혹은 좀 더 잘나 보이고 싶어서 애썼던 것 같다. 허투루 쓰고 싶지 않은 마음도 있었다. 시가 뭔지 아직도 모르겠지만 마음을 다해 쓰고 싶다.
읽고 쓰는 삶을 지속하다 보면 삶이 보잘것없이 느껴질 때가 있다. 그러나 시 쓰는 걸 두려워하는 시인의 삶도, 매일 아침 출근하는 회사원의 삶도 나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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