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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씨앗
‘확찐자’라는 표현은 언어유희가 아니다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2021년 04월호

 

대학에서 강의할 때, 현상을 관찰해 의미 있는 가설을 수립하는 훈련을 종종 했다. 과거에 비해 어떤 경우가 증가 혹은 감소한다는 시간적 사실을 제시하고 상상할 수 있는 모든 상관관계를 자유롭게 고민해 보는 식이었다. 물론 누구나 알 만한 이야기가 아닌 친숙한 것을 낯설게 보는 데 중점을 뒀다. 예를 들어 자살률 증가의 원인을 ‘할 수 있다!’는 각오가 남발되는 사회 풍토에서 찾는 식이다. 불가능은 없다는 분위기는 모든 것을 개인 책임으로 바라보고 받아들이는 경향도 덩달아 키우기에 패배의 쓴맛도 강해지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회는 ‘당사자는 의도하지 않았다고 생각해도’ 굉장히 의도된 결과로 뭉쳐져 있다.
‘비만 인구 증가’를 큰 주제로 던진 적이 있다. 서구식 식습관이 문제라는 건 초등학생도 알고 있으니 ‘은폐된 것들’을 발견해 보라고 했다. 가장 논쟁적인 건, 마냥 긍정적으로 느껴지는 ‘몸 관리’라는 말이 일상의 용어가 되면서 비만 비율도 늘어난다는 주장이었다. 몸 관리를 안 해서 비만인데 무슨 소리냐는 반론도 있었지만 학생들은 자신을 짓누르는 공기의 진짜 정체를 하나둘 꺼내기 시작했다.
신체가 상품이자 도덕이 된 세상이다. 살 빼서 인생이 달라졌다는 이야기가 빈번한 만큼, 살만 빼면 어떤 문제도 해결되는데 왜 불평불만이냐는 빈정거림도 흔해졌다. ‘살이 찌면 게을러 보여’라는 표현을 편견이라면서 따지는 사람은 없다. 누가 상처를 받아도 자기 업보일 뿐이라는 차디찬 확인 사살만이 따를 뿐이지 혐오의 수위는 조절되지 않는다. 현대사회에서 ‘뚱뚱함’은 뚱뚱한 걸 넘어 비정상으로 간주돼 자기 관리의 실패를 증명한다. 그러니 취업역량과 무관한 것처럼 보여도 실제로는 매우 상관이 있다.
몸에 대한 기준이 상향 조정되니 모두가 살을 빼야 한다고 생각하고, 모두가 살찐 자에게 손가락질하면서도 부끄러움이 없다. 그러니 다이어트에 성공한 자들은 불필요하게 상승한 자신감을 제어하지 못해 오만해지고, 이는 다이어트가 필요해 보이는 이들을 멋대로 선별해 자존감을 짓밟아버리는 수순으로 이어진다. 비만 이전에 폭음, 폭식의 식습관이 있었다면 그 이전에는 신체를 ‘가혹하게’ 평가하는 세상에 지친 이들의 스트레스가 존재했을 것이다.
‘확찐자’라는 언어유희가 코로나 시대에 유행 중이다. 풍자와 해학의 민족답다면서 다들 웃고 넘기지만, 권력을 상대하는 것도 아닌 그저 활동량이 줄어 체중이 증가했다는 걸 이리도 비꼴 수 있을까? 아마 살이 ‘찐’ 걸 거대 악으로 봤던 습관이 있었기에 확‘찐’자의 어감도 완성됐을 거다. 이런 표현을 자신에게 스스럼없이 사용하는 이유는 ‘나도 살찐 게 문제라고 생각해요!’라고 먼저 인정하는 게 일종의 도리가 됐기 때문이다. 신체를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하는 세상에 적응한 사람들의 자기 검열이랄까?
개인들이 알아서 반성하니, 사회는 살이 찐 사람을 부정적인 이미지로 그려내는 데 거침이 없다. TV 공익광고에서는 집에서 배달 음식만 시켜먹다가 살이 쪘고 다시 정갈하게 음식을 먹어 체중 조절에 성공했다는 내용이 등장한다. 어떻게든 비만과 게으름을 연결시키려는 이런 전개는 욕먹기 싫어서 살을 빼고야 말겠다는 의지를 다지는 이들을 증가시키고, 마찬가지 이유로 살찐 사람을 한심하게 바라볼 수 있게끔 한다.
표준 체중일수록 건강 지표가 좋다는 걸 누가 부정하는가. 비만인 사람이 살을 빼면 여러 질환에서 자유로울 수 있다는 건 다 안다. 이 정보가 누군가에게 건강하고 싶다는 욕망과 각오로 이어진다면 좋은 일이다. 하지만 ‘살이 찌면 건강에 안 좋다’는 사실이 누군가에 대한 혐오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인간의 존엄성이 ‘체중’이라는 수치를 기준 삼아 선별적으로 부과될 수 없다는 건 상식이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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