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고기는 사시사철 언제 먹어도 마냥 좋다. 돼지고기 역시 한여름 불볕에 구워도, 엄동설한 한겨울에 두툼하게 구워도 좋다. 참외는 여름 과일인데 이제 겨울에 더 맛있고, 겨울의 귤과 만감류도 가을부터 달콤하다.
잃어가는 제철의 미각, 여전히 바다로부터
다르게 말하면 제철이 사라졌다는 의미다. 여름 소고기는 먹이에 물기가 많아 물맛이고 겨울이 제맛이라던 말도 ‘전설의 고향’쯤 되는 이야기가 됐다. 요즘 소들은 사시사철 일정한 먹이와 일정한 수분을 공급받아 계절에 따른 맛 차이가 미미하다. 더군다나 태평양 건너와 적도 너머에서도 소고기가 넘치도록 들어오니 계절을 느끼기보다는 산지를 느낄 만한 식재료가 됐다. 돼지고기 역시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제철에만 맛봐 소중했던 온갖 과일도 이제 제철의 선을 넘는다. 일부 노지 재배한 과일이 아닌 한 가온 시설 재배를 통해 제철에 상관없이 툭툭 등장한다. 한여름 참외는 겨울을 전략적으로 공략하고 있고, 귤과 만감류도 서둘러 소비를 선점하느라 가을부터, 숫제 여름에도 나오기도 한다.
윤택한 문명을 누리게 됐을 때 우리는 제철성을 잃었다. 농축산물이라는 자연에 인간이 개입할 수 있는 한계가 극복될수록, 맛을 통해 느끼고 누렸던 제철의 반가운 기쁨과 짧아서 아쉬운 애틋함은 편리함에 희석될 수밖에 없었다. 잃어버린 제철성은 이제 야생에 가야만 출납할 수 있다. 연둣빛 카펫을 덮은 노지 봄나물의 강인한 향, 가을철 풀숲에서 채집한 야생 버섯의 깊은 감칠맛은 비할 데 없이 소중하다. 그러나 생각보다 많은 ‘야생처럼 보이는’ 나물과 버섯이 알고 보면 재배한 것이라는 점에서 나는 대지의 야생보다는 바다의 야생에 좀 더 제철의 미각을 기대하고 있다.
어쩌면 우리에게 마지막 남은 야생, 인간이 개입할 수 없는 경외의 실존은 저 넓고 깊고 푸른 대양밖엔 없는 것이 아닐까. 편리함이 감히 끼어들 수 없는 바다의 자연이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내어주는 것들을 수동적으로, 다만 적극적으로 취하는 것이 바다와 인간의 미각 관계도이니까.
봄철 바다의 맛있는 노래
꽃잎 나부끼며 봄이 덥혀지는 때, 우리는 바다의 자연에 식욕을 위탁한다. 봄 내내 우리는 주로 도다리쑥국 합창을 한다. 흙의 맛을 머금은 명산지의 쑥과 통통한 봄 도다리로 구수하게 끓인 국 한 냄비는 전국적인 봄철 별미로 꼽힌다. 서울 을지로 ‘충무집’은 해마다 봄만 되면 제철 맛을 찾는 TV 프로그램에 등장해 도다리쑥국과 멍게밥으로 진한 향기를 송출하곤 한다.
노량진 수산물도매시장에서도 도다리 소식이 들려온다. 서울뿐 아니라 경기권까지 척척 배달해 준다는 노량진 횟집마다 ‘봄 도다리 회’, ‘봄 숭어 회’를 열성적으로 권한다. 사철 먹는 광어와는 또 다른 녹진한 기름기와 달콤함을 머금은 도다리, 오도독한 질감으로 탱글탱글한 숭어 회로 고소한 봄을 만끽한다.
봄 바다의 식욕으로 또 하나 놓지 못할 것이 조개류다. 찬물에서 슬슬 잠을 깨어 몸집을 채우기 시작하는 봄 조개의 향연. “봄 조개를 맛보지 않는 것은 봄을 낭비하는 일이다”라고 몇 해 전 단언해 쓴 일이 있었는데 지금도 변함없는 확신이다. 희귀하고 비싼 고급 조개까지 굳이 논하지 않더라도, 발에 치이도록 흔한 바지락만 해도 봄철에 제대로 알이 오른 봄 바지락이 월등히 맛이 좋다. 큼직한 바지락을 산지에서 올려 살만 발라내 솥밥을 지어도 좋고, 껍데기째 후루룩 봉골레 파스타를 해 먹어도 맛이 가득하다. 기실 도다리쑥국 노래도 2절은 바지락쑥국이다. 도다리만큼의 화려함은 없을지언정 샐 틈 없이 감칠맛을 듬뿍 채운 달콤한 바지락 맛이 듬뿍 든 쑥국은 도다리 못지않게 봄철 미각적 허기를 꽉 채워준다.
그리고 봄 노래 3절. 봄 멸치다. 그물 가득 둘둘 감긴 큼직한 멸치는 싱싱한 채 살을 발라 회로도 즐기고, 채소와 갖은양념에 회무침으로도 입 안 가득 고소하게 먹는다. 생멸치로 진한 맛의 찌개를 끓여도 제맛이다. 나는 다른 무엇보다도 멸치쌈밥을 가장 부산다운 진미로 꼽아 부산을 방문할 때마다 꼭 중앙동에 들러 먹고 온다. 고릿하면서도 구수하기 이를 데 없는 멸치찌개 맛은 그 어느 때보다도 봄이 제맛이다.
대망의 4절 주인공은 주꾸미다. 알 꽉 찬 주꾸미를 이야기하지 않고는 봄이 끝나지 않는다. 가을의 주꾸미는 야들야들한 살집이 매력이지만 봄의 주꾸미는 톡톡 터지는 ‘밥알’이 마성을 이룬다. 그 물리적인 자극을 가장 잘 누리는 조리법은 뜨거운 샤부샤부다. 봄철 채소로 맛을 낸 육수에 주꾸미를 풍덩 넣어 다리 먼저 먹고, 머리는 속까지 고루 익을 때까지 기다려 따로 음미한다. 마침 주꾸미 샤부샤부는 겨울 새조개 샤부샤부와 배턴 터치하며 계절을 잇기에 더욱 봄을 실감하게 한다.
노래에 5절도 있다면, 주연급 조연 격인 미더덕을 사심으로 추천한다. 겨울 제철인 오만둥이와 비슷하지만 아주 다른 멍게의 친구다. 무말랭이나 오돌뼈처럼 오도독거리는 식감이라 아귀찜이며 해물찜에 빠지지 않는 오만둥이는 씹는 맛으로 먹고, 미더덕은 작은 살집에 바다 향을 찌릿찌릿하게 품은 몽글거리는 식감에 먹는다. 서울 종로구 내자동의 ‘안주마을’은 회전율이 높고 제철 해산물 구색을 두루두루 폭넓게 갖춰 철마다 바다 맛을 채우러 가기 좋은 곳이다. 안주마을에선 봄철 미더덕 또한 빼놓지 않고 챙기는데, 선도가 워낙 좋아 아무 양념 없이 먹어도 비리지도 싱겁지도 않은 진한 미더덕회를 즐길 수 있다. 집에서 미더덕을 넣고 된장찌개를 끓여도 그 시원한 향취와 구수한 된장의 조화가 기적의 맛을 이룬다. 봄철 즐겨 차리는 집밥 메뉴다.
바다의 맛 이야기는 아무리 불러도 질리지 않는 노래다. 봄의 바다 맛 노래 후렴쯤에는 어김없이 팔뚝만 한 암꽃게가 알 꽉 찬 축제를 연출하고, 아쉽게 노래 한 곡이 끝나면 또다시 여름 바다의 노래가 시작된다. 그리고 또 가을의 맛 타령, 겨울의 바다 찬가…. 야생이 순환하고 인간이 그 흐름에 개입할 수 없는 딱 그 지점에, 마지막 남은 바다 딱 그곳에 우리가 계절을 살아내는 즐거움이 있고 주어지는 것을 받아들이며 누리는 겸허한 맛의 기쁨이 있다. 그리고 그 자체가 본능적인 식욕이 아닐까, 나는 생각한다. 더 이상 그 무엇도 귀하거나 소중하지 않은 ‘편리한’ 풍족의 시대, 간절한 맛을 떠올릴 때마다 저 깊은 바다로부터 때마다 주어지는 것들에 군침을 머금게 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