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모바일 대메뉴명

KDI 경제정보센터

16개 경제부처가 만드는
국내 유일의 경제 정책 정보지

나라경제

발행물

칼럼

김창기의 영화상담실
가장 찬란한 순간 우린 하나였다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1년 05월호


1년 중 가장 찬란한 5월이다. 청소년기를 갓 끝낸 딸에게 가장 좋아하는 봄 영화가 뭐냐고 물었다. 뜻밖에도 〈써니〉란다. “‘가장 찬란한 순간 우린 하나였다!’ 몰라? 봄처럼 풋풋하고, 더 중요한 건, 엄청 재미있잖아?”
〈써니〉가 그렇게 재미있는 영화였던가? 부적응 청소년들이 뭉쳐 다니며 함께 다양하고 과장된 날라리(품행장애)적 언행을 남발하는 장면들만 떠오르는데?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는 현실을 당분간 외면하게 해주는 가볍고 즐거운 경험을 함께하는 관계가 우정일까? 우정이 그렇게 쉽게 잊혀지고, 갑자기 들불처럼 되살아날 수 있을까? 어른이 된 과거의 친구들이 다시 만나는 과정도 어색하고, 학교폭력이 큰 문제인 요즘에 나왔다면 ‘일진 미화’라는 평가를 받았을 텐데….
영화를 다시 본다. 딸의 입장이 돼보려고 그 나이의 내 모습을 기억하려 애쓰면서. 그렇게 보니 웃기다. 재미있다. 나도 그렇게 유치했었고, 답답했고, 풀어헤친 교련복에 흰 운동화로 나름의 개성을 주장했었다. 팝송에 영혼을 팔았던 그 시절 라디오를 끼고 살았고, 여학생과 사귀고 싶은 간절한 열망 때문에 좋아하지도 않는 디스코나 슈가팝으로 도배된 롤러스케이트장에서 세월을 보냈다. 고등학생에게 일반적으로 요구되는 사항들을 벗어난 생활을 꽤 오래 하다 보니 여러 다른 이유로 나와 비슷한 생활을 하던 아이들과 친구가 됐고, 영원히 함께하자는 우정의 약속도 했었다. 그땐 그랬지!
그때가 가장 찬란한 순간이었던가? 권위에 대한 저항을 표방한 현실 외면, 즉각적 만족 추구, 심지어는 간헐적인 비행을 저지르면서 느꼈던 쾌감들은 절대로 아니다. 하지만 어떤 조건 없이 서로를 위하던 그때의 친구들과 첫사랑의 여학생을 기억하면, 분명 찬란한 순간이었다. 그래도 다시는 돌아가고 싶지 않은 시절이고, 기쁨보다는 후회가 더 많은 순간이었고, 찬란한 순간들은 그 후에 훨씬 더 많이 있었다. 지금도 연락을 하는 그 시절의 친구는 한 명뿐이다. 그것도 아주 가끔씩.
돌아보면 나의 가장 찬란한 순간의 최상위에는 친구나 이성이 아닌 내 아이들과의 순간들이 있다. 특히 아이들이 어렸을 때의 순간들. 나에게 가장 찬란한 때에 아이들과 아내는 함께했고, 서로를 향한 사랑에 한 치의 의심도 없었고, 우리는 하나였다.
아이들은 자라서 독립적인 인간이 된다. 이제는 나의 가족도 하나가 아니라 ‘우리’가 됐다. 청소년들은 독립적인 개인이 되기 위해 ‘하나’라는 가족에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아직 미숙하기에 친구들과의 연결을 통해 ‘하나’의 기능을 유지한다. 힘들 때 힘이 돼주고, 기쁠 때 함께 느끼는 그런 ‘하나’.
우정이나 사랑의 공동체가 계속 유지되려면 지속적인 동질감, 같은 방향성, 서로에 대한 대체 불가성이 필요하다. 찬란한 순간은 나 혼자가 아니라 함께 경험하며 서로를 확인하는 순간이다. 내 청소년기의 친구들은 〈써니〉의 멤버들처럼 동질감과 방향성이 일치하지 않음을 이해가 아닌 세월로 알게 되며 서서히 멀어져갔다. 가끔 만나도 과거의 확인에 그칠 뿐이다. 죽마고우들과 아직도 친하게 지내는 친구들을 보면 많이 부럽다. 친구들이 서로의 삶에 꾸준한 기록과 거울이 돼주고 있으니까.
다시 〈써니〉를 보게 하고, 잊고 있던 여드름투성이 시절의 나를 만나게 해준 딸에게 감사하다. 그리고 딸에 대한 눈높이가 ‘사랑하기 때문에’ 너무 일찍 상향 조준돼 있었음을 알게 돼 다행이다. 딸에게 어른인 부분도 있지만, 아직 철부지인 부분이 훨씬 더 많이 남아 있다는 사실을.
아이들과 아내와 나는 이제 ‘하나’가 아니고 ‘우리’지만, 우리는 많은 찬란한 날을 함께 만들어냈고,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어쩌면 전혀 기대하지 못했던 훨씬 더 찬란한 날들을. 그런 순간들을 얻기 위해 우린 어려운 청소년기와 그 다음 단계에서의 더 어려운 관문들을 인내와 노력과 서로의 연결로 통과했듯이 함께 더 성장하고 성숙해질 것이다. 그때 우린 서로에게 말할 것이다. “가장 찬란한 순간을 우리 함께 만들었다!”고.
KDI 경제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