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사학위를 받고 나자 나는 욕심이 났다. 그것은 대학의 교수가 되는 것이다. 박사학위를 받은 사람이라면 대부분 갖는 자연스러운 꿈이긴 하다. 대학교 신임교수 초빙 공고만 나면 지원서를 제출했다. 논문도 열심히 써야 했다. 많은 논문이 자격 조건이었기 때문이다.
이때 나는 창작과 연구를 병행하는 소장학자였다. 국어국문학과에 입학한 뒤 소설가의 꿈을 갖게 됐고, 문학을 공부하다 보니 국문학의 늪에 풍덩 빠졌다. 결국 대학원 석사, 박사 과정까지 계속해서 공부를 했다. 그렇게 학위까지 받은 것이다.
첫 난관은 모교에서 강의 기회를 얻는 거였다. 동기들은 다 한 과목씩 강의를 배정받을 때 나는 배제됐다. 장애가 있기 때문에 강의하기 어려울 거라 지레짐작하고 나를 투명인간 취급했다. 학교에 항의했다. 결국 다음 학기에 강의를 맡았다. 강의 기회라는 것이 해보니 장애가 있고 없고가 중요한 것은 아니었다. 얼마나 열정을 갖고 학생들을 가르치고 그들에게 애정을 주느냐가 문제일 뿐이었다. 이후로도 논문을 열심히 쓰고 대학마다 원서를 냈지만, 나를 떨어뜨리는 이유는 다양했다.
“우리 학교엔 엘리베이터가 없습니다.”
“장애인이 교수가 된 적이 한 번도 없어요.”
“학생들 지도하기 힘드시잖아요? 판서는 어떻게 합니까?”
떨어질 때마다 다음엔 되겠지 하는 마음으로 열심히 준비만 하고 있었다. 그때 나를 총애하던 학과장 교수가 불렀다.
“고 군, 자네 어찌 지내나?”
“선생님, 이번에도 교수임용 떨어졌습니다. 논문을 좀 더 좋은 걸로 열심히 써야 할 것 같습니다.”
국문학과에서 논문이라는 것은 남의 작품을 연구하는 업적이다. 학과장 교수는 문학이 아니라 어학을 전공했다. 고전문학에서 〈춘향전〉 연구에 수없이 많은 논문이 나오는 것을 보며 일갈한 적도 있다.
“어떻게 국문학은 춘향이 치마폭에서 벗어나질 못하고 있습니까?”
고답적인 학계에 던지는 통쾌한 돌직구였다. 학부생일 때 내가 학교 신문에 쓴 꽁트 같은 것을 읽고 재능을 높게 사주기도 했다.
“고 군, 자네 글도 잘 쓰는데 굳이 교수가 되려고 그러는가?”
“예. 그렇습니다.”
잠시 뭔가 생각하더니 입을 열었다.
“남의 작품 연구할 생각 말고, 남들이 자네 작품 연구하게 해.”
뒤통수를 맞은 것 같았다. 내 삶이 바뀐 결정적인 순간이었다. 습작을 하고는 있었지만 남들이 내 작품을 연구하리라는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가슴에 생긴 균열이 점점 벌어졌다. 돌이켜 보면 장애를 결격사유로 보는 대학에 자리를 잡으려는 내가 안쓰러웠던 것 같았다. 그 뒤 모 잡지의 편집 주간이 내가 투고한 소설들을 보더니 만나자고 했다.
“고 선생은 평론하는 게 어때? 박사학위까지 받으며 공부했는데 내가 이끌어줄게.”
좋은 기회였다. 하지만 그때 나는 학과장 교수의 말이 떠올랐다. 결단을 내려 한마디 했다.
“아닙니다. 저는 소설가가 되고 싶어요. 제 작품을 남들이 평론하게 하려고요.”
30년이 지난 지금 학위를 받은 사람들이 가끔 나를 찾아와 자신의 논문을 주고 간다. 내 작품을 연구한 논문이다. 이제 나는 전업작가의 길을 30년 넘게 가고 있다. 교수가 못 된 걸 조금도 안타까워하지 않는다. 나의 관심사는 보다 나은 작품을 쓰며 계속 성장하는 작가가 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