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 연구개발(R&D)이 4차 산업혁명 시대 혁신생태계에서 핵심 분야라고 한다면 고개를 갸웃할 분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은 2차 세계대전 이후 R&D 예산의 절반 이상을 국방에 꾸준히 쏟아붓고 있다. 미국의 국방부 산하기관인 방위고등연구계획국(DARPA; Defense Advanced Research Projects Agency)은 인터넷에서부터 무인자동차와 로봇에 이르기까지 4차 산업혁명의 핵심 과학기술을 개발했다. 시장경쟁에 노출돼 있는 민간 기업이 투자하기 힘든 고위험·고부가가치 연구를 정부가 국방 R&D 예산으로 지원하면서 숨겨진 산업정책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신기술 분야의 산업경쟁력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국방에 최첨단 기술 받아들이려는 미국, 공군에서 스타트업 투자회사 만들기도
특히 지난 3~4년 동안 미국에서는 ‘뉴 디펜스’라고 해 벤처 펀딩을 받는 스타트업들의 혁신을 신속하게 국방에 받아들이기 위한 노력이 활발하다. 우주항공 분야를 비롯해 인공지능(AI), 로봇공학 등 최첨단 기술을 흡수하기 위해 스타트업과의 강력한 파트너십 구축에 필요한 복잡한 규제와 계약과정을 모두 스타트업에 맞춰서 진행하고 있다. 국방이 실리콘밸리로 대표되는 민간 분야보다 뒤처지고 있다는 위기의식 아래 공군은 스타트업들이 가장 선호하는 투자자가 되겠다는 비전을 밝히고 미 공군 벤처스(Air Force Ventures)라는 투자회사를 만들었다. 이렇게 미국의 국방 R&D는 4차 산업혁명의 핵심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한편 우리는 미국이 구소련의 세계 최초 인공위성인 스푸트니크 위협에 대응해 바로 DARPA를 설립했다는 사실을 상기할 필요가 있다. 필자는 몇 년 전 미국의 한 국방과학연구소를 방문해 한국인 과학자 한 분으로부터 매우 흥미로운 아이디어를 들은 적이 있다. 북한의 미사일 공격에 즉각적으로 신물질의 돔을 허공에 펼쳐서 방어하는 과학기술을 개발하자는 것이다. 공상과학소설에나 나올 이야기로 들리지만 이미 우주로 가는 엘리베이터 기술을 개발하겠다는 미국의 창업 기업이 대규모 투자를 받을 정도로 신소재 기술이 발전하고 있어서 한국의 과학기술력으로 충분히 도전해 볼 수 있다는 제안이었다.
그러나 이 과학자가 크게 아쉬워한 것은 한국의 과학자들과 이야기했을 때 충분히 도전할 만하다는 반응도 있었지만 당장 이러한 도전적인 국방연구 과제를 발굴하고 지원하는 체제가 한국에는 미약하다는 것이다. 사실 과학자가 아닌 필자로서는 이러한 아이디어가 얼마나 현실적으로 가능할지에 대해서는 판단할 수 없다. 하지만 DARPA의 많은 연구 과제가 그 분야 전문가들에게도 매우 도달하기 힘들어 보이는 도전적인 과제들이라는 데 주목해야 한다. 국방 R&D는 이렇게 기존에 알려진 지식의 영역을 뛰어 넘어서는 새로운 발견을 통해 국가 안보뿐만 아니라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낼 수도 있다. 만약 허공에 돔을 펼칠 수 있는 신물질이 개발된다면 이 기술이 단지 국방에만 활용되지 않고 새로운 산업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라는 것은 쉽게 예측할 수 있기 때문이다.
사실 우리가 도전적인 국방 R&D를 크게 활성화시키는 데는 추가적으로 많은 정부 예산의 투입이나 인력의 대량 충원 없이도 가능하다. 우리나라의 총 R&D 투자 규모는 이미 미국, 일본, 중국, 독일에 이어 세계 5위권이다. 우리나라가 과학의 나라로 알려진 영국보다도 R&D에 더 많이 투자한다는 사실을 이야기하면 놀라는 사람이 많지만 그만큼 우리는 이미 과학기술 투자 강국이다. 그러나 우리 국방 과학기술은 미래 전장에서 중요성이 더욱 커지고 있는 감시정찰, 지휘통제통신 등의 분야에서 선진국과의 격차를 좁히지 못하고 있다. 문제는 국방 과학기술 혁신을 가로막는 부처 간, 기관 간의 칸막이와 우리의 우수한 과학자들로 하여금 과감하게 도전하지 못하게 하는 시스템에 있다. 무엇보다도 국방 R&D에 있어서 대학, 출연연, 대기업, 중소·벤처기업 등 민간의 다양한 R&D 주체들과의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기술·정보·인력·시설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력체계를 구축하고, 이를 바탕으로 도전적 고위험·고부가가치 연구에 투자하는 새로운 접근이 요구된다.
도전적 연구에 투자하는 새로운 접근 요구돼···상당한 독립성 갖춘 연구기관 설치해야
첫째, 미국의 DARPA와 같은 성격의 첨단국방연구기획원(가칭)을 설치해 상당한 독립성을 갖고 국방 관련 도전적 연구 과제들을 기획·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첨단국방연구기획원(가칭)은 국방부의 R&D를 담당하는 최고 책임자에게만 직접 보고하도록 하되 구체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국방부의 세부적인 지시를 받지 않고 독자적으로 결정할 수 있도록 법적으로 독립성을 부과한다. 그리고 이 기관의 PM(Project Manager)들에게 독립적으로 혁신적인 프로젝트를 기획할 수 있는 재량권을 부여해 국내외 최고의 과학자와 기술자를 활용해 거의 불가능하다고 여겨질 정도의 도전적 과제들을 기획해 추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둘째, 급변하는 미래 국방환경 및 기술 변화에 대응해 신속하고 혁신적인 국방 R&D 기획절차를 강화해야 한다. 기존의 일방향적, 하향식 국방 R&D 기획과정에서 R&D 수행주체의 기술제안이 적극 반영될 수 있는 쌍방향적 기획과정으로 전환돼야 한다. 동시에 국방 기술 R&D에서 개방형 혁신(open innovation) 체제를 도입하는 것을 목적으로, 국책연구기관·민간연구소·대학 등의 참여를 바탕에 둔 고위험·고성과(high-risk, high-return) R&D를 통한 와해성 혁신을 추구해야 한다.
셋째, 기존의 기술개발 중심의 민군 기술협력을 전 주기적 민군 기술협력 전략으로 확장해야 한다. 이와 함께 민수 분야에서의 급속한 과학기술 발전성과를 국방 분야에 적극적으로 도입·활용하기 위해서는 보다 과감한 개방형 혁신활동과 관련 정보공유가 확대될 필요가 있다.
마지막으로, 방산 기업들의 R&D 역량 강화, 정부출연연구소에 특정 국방 R&D 임무 부여, 첨단 기술력을 갖춘 민수 기업들의 국방 R&D 참여 유도 등을 통한 국방 R&D 수행주체의 다원화를 추구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