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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작은 산을 오르는 수고
남궁인 응급의학과 전문의, 작가 2021년 06월호


누구에게나 그런 시기가 있을지 모른다. 우연히 읽었던 시구가 머릿속을 떠나지 않아 길을 걷다가도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시기가. 적어도 옛날의 나는 그랬다. 두뇌의 예민한 근육이 전부 글을 읽고 감동받기 위해 준비되어 있었다. 적당한 질료만 넣어주면 문장을 빨아들이듯 흡수하던 때였다. 벅차오르는 느낌을 재현하기 위해 도서관에서 유명하다는 책이면 무조건 집어 읽으며 학교를 다녔다. 학교 앞에서 문예지 정기구독을 권하는 판매원에게 넘어가 카드 할부를 긁고 오기도 했고, 시집이나 소설집이 손에 들려 있어야 등교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는 의과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의학 외에 다른 수업을 들어본 일이 없었다. 주변 친구들 또한 문학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문학은 그야말로 나만 즐기는 세상이었다. 훌륭한 고전 명작과 시 세계를 새롭게 휩쓰는 사조와 막 출간된 소설가의 신작과 그에 따른 혹독한 비평 등…. 이 흥미로운 세상을 친구들은 아무도 몰랐다. 가끔 문학의 멋짐을 설파해도 친구들은 이성에게 잘 보이기 위해 글과 책을 선택했다며 놀리곤 했다.
그럼에도 꿋꿋하게 책을 읽고 시를 썼다. 누군가와 문학을 나누고 싶은 갈증이 있었지만 학사 일정에 쉽지 않았다. 그러던 어느 날 호된 실연을 당했다. 별안간 그녀는 허수경의 시 한 구절을 남기고 영영 떠나고야 말았다. 큰 충격을 받아 식음을 전폐하고 매일 일기를 썼다. 순식간에 살이 빠졌고 반동으로 독서에 몰두했다. 문학으로 상처를 치유하겠다는 이상한 생각이 있었다. 책 속의 이별 장면이 모두 나를 기술하는 것 같았다. 그러다 문득 의학 도서관에 붙어 있는 A4 용지 한 장을 발견했다.
‘O대 문학회
학번에 관계없이 가입 환영’
종이는 테이프 하나로 기운 없이 붙어 있었다. 모양새부터 자신감이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내가 다니던 의대는 다른 과와 거의 다른 학교였다. 의대 캠퍼스는 본교와는 멀리 떨어진 산 위에 있었다. 커리큘럼 또한 완벽히 달랐다. 의대생은 대부분 의대 내부 동아리에 속했고, 본교 동아리에는 아무도 가입할 생각을 하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갑자기 계시를 받은 것 같았다. 문학 세미나에 충동적으로 참가하기로 했다. 새하얀 ‘백석 전집’을 들고 긴장감으로 문학회 동아리 방문을 두들겼다. 실연의 고통을 예술로 승화하기 위해 문학의 세계로 진입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안에는 침울한 남자 넷이 앉아 있었다. 막상 그들이 나보다 더 놀랐다. “거봐. 의대에서도 오는 사람이 있다니까.” 그들은 솔직히 말했다. “어차피 의대에선 아무도 안 오니까 안 붙이려고 했는데, 회장님이 몇 년간 꿋꿋이 산에 올라가 종이를 붙였어요.” 그러니까, 나는 ‘혹시나’에 낚인 학생이었던 것이다.
하여간 그럭저럭 세미나가 시작되었다. 신세계였다. 모두가 대작가와 새로운 시의 사조와 소설가의 신작을 알았다. 공기 중에서 헤엄치다가 물을 만난 물고기가 된 것 같았다. 그곳에서 합평(合評)의 세계를 처음 알았고, 훗날 시인이나 소설가가 될 학형들과 술을 마셨다. 그 안에 쌓인 온갖 종류의 책들과도 함께였다. 그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내내 혼자 헤엄쳤거나, 지쳐서 그만둘 수도 있었을 것이다. 새로운 세상과의 조우에 큰 역할을 한 것은, 아마도, 문학회 회장이 등반하는 수고를 아끼지 않은 덕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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