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자 할머니의 순대는 맛이 있다. 찹쌀이 듬성듬성 섞인 순대는 진하고 고소한 맛을 제대로 내고, 촉촉한 간도 부드럽기 그지없다. 허파며 귀, 염통이나 울대, 애기보 등 특수부위까지 다채롭다. 독특한 것은 돼지 볼 부위. 두툼한 비계가 아삭하게 씹히는데 느끼하기는커녕 상쾌하게 입맛 당기는 맛이다. 대량생산되는 요즘 순대와는 남다른 순자 할머니의 옛날식 순대는 쾌적한 냉난방 완비 상가가 아닌, 세운상가 필로티 기둥 아래 리어카에서 맛볼 수 있다.
순대로 벼려온 순자 할머니의 삶
순자 할머니는 서른셋부터 팔순을 넘긴 지금까지 순대로 삶을 살았다. 단골들에게 ‘리어카 순대’라는 이름으로 불릴 뿐, 상호도 주소지도 없이 여름의 혹서와 겨울의 혹한을 그 긴 세월 동안 길에서 났다.
어린 딸과 젊은 아내 순자, 평범했을 가정을 버린 남편 대신 돼지의 오장육부로 지탱한 삶이었다. 바람난 남편도, 가르치고 입히고 먹여야 할 딸도 없던 시절의 열아홉 소녀 순자 씨가 그토록 좋아하던 순대. 어릴 적부터 순대 좌판만 보면 대여섯 번씩은 뒤돌아보며 군침을 삼켜야 했던 순대. 1년 내내 순대 잘 삶는 이를 쫓아다니며 기어코 배운 순대로 순자 씨는 바라만 보던 순대 좌판 자리에 스스로 앉았다. 좋아하는 음식이 매일 손목이 시큰하도록 주물러대야 하는 생업이 됐을 때 얼마나 고역이었을까. 그 생업의 피 냄새를 질색하는 어린 딸의 사춘기는 얼마나 생채기였을까. 가부장의 시대에 가장(家長) 없는 세상에 무방비로 던져진, 지금의 나보다도 어린 순자 씨가 찾아낸 삶의 기술이 하필 그 좋아하던 순대였을 뿐인데.
2019년 취재로 연을 맺은 후, 내게 있어 순자 할머니는 세운상가에 둔 새끼손가락만 같아졌다. 순자 할머니는 날이 뜨거우면 뜨거운 대로, 얼어붙으면 얼어붙은 대로 리어카를 지킨다. 인적이 뜸하던 리어카에 멀리서도 맛을 보러 찾아오는 독자들이 생기면서, 순자 할머니는 그 발길이 고마울 때마다 나의 안부를 궁금해 한다. 시간이 나서 어쩌다 한번 들르면 두 손이 무거워 마음도 무겁다. 마음만큼 자주 갈 수 없는 곳인데, 그곳에 나를 그리워하는 이가 있기에 나 역시 아린 새끼손가락처럼 순자 할머니의 안부가 궁금하다. 그리고 순자 할머니의 리어카 위 순대가 갖는 춥고 더운 삶의 무게가 때로 안타깝다.
한편 동대문 어귀의 연탄구이 돼지갈비집 ‘경상도집’의 최정희 씨는 2대째다. 어머니 김필례 씨가 나이 서른에 경북 청송에서 서울로, 돈벌이를 찾아 가족의 터전을 옮겨 차린 백반집이 경상도집의 시작이었다. 이제 팔순을 넘긴 김필례 씨는 평생 새벽 5시부터 근면하게 일하며 동대문 노동자들을 든든히 먹였다. 시집갔던 딸 최정희 씨가 경상도집으로 돌아온 것이 17년 전이다. 백반 대신에 술장사도 되는 돼지갈비를 전문 메뉴 삼아 밤이면 어두워지는 외딴 골목에 플라스틱 테이블을 깔았다. 연탄불을 피워 새벽부터 마련한 돼지갈비를 굽고 또 굽고, 사시사철 종종걸음으로 밤 10시까지 동분서주하며 어머니의 근면을 더 억척스럽게 잇는다. 큰오빠도 가업을 이었다. 경상도집에 들어오는 대신에 경동시장에 ‘감초식당’을 따로 차려 새로운 가지를 냈다.
김필례 씨는 남매들이 이은 가업을 바라보며 어떤 심경일까. 적어도 초라하거나 허름한 심정만은 아닐 것 같다. 최정희 씨가 경상도집의 부흥을 뿌듯한 성취요 보람으로 여기는 등 곧은 모습인 한은 말이다. 짭짤한 경상도식 부추김치에 매콤한 콩나물국이 따라붙은 간 좋은 돼지갈비 그리고 고적한 밤 골목을 밝히는 흐릿한 알전구 불빛은 경상도집을 ‘노포 힙스터’들에게 ‘야장 성지’로 불리게 했다. 밤이면 밤마다, 낮이면 낮인 대로 경상도집 특유의 분방한 정서와 빼어난 맛을 찾아 객들이 모여든다.
이제는 사라진, 진하면서 음전한 특미
동대문디자인플라자가 도시의 인상을 바꾼 곳에서 조금 떨어진 광희동 사거리 뒷골목엔 ‘부부청대문’이라는 식당이 있었다. 소고기 여러 부위를 통째로 고아내 진하게 입에 붙는 국물을 내고 푹 삶은 우거지를 듬뿍 깔아 해장국을 내던 식당이다. 이른바 ‘특미 해장국’. 집간장, 집된장이 아닐 수 없는 진하고 투박한 감칠맛과 찌르르한 짠맛이 강렬하면서 동시에 또 음전했다.
하루 한두 시간 반짝 열어 고작 서른 그릇 남짓 매일 끓여 파는 게 전부였다. 그나마도 몇 인분씩 포장해 가던 큰 손 단골들 때문에 아예 먹지 못하고 돌아서는 날이 더 많았다. 탕을 안치고 고기를 썰던 할머니 두 분 중 한 분이 편찮으셔서 몇 달 쉰다는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결국 여태까지 문을 열지 않게 됐다. 노쇠를 무슨 힘으로 막아낼까 싶어 마음을 돌리다가도 어리석은 미련이 자꾸 남는다. 문을 닫은 지도 몇 해가 훌쩍 넘었음에도 유독 생생한 맛의 기억이다.
토렴할 고기를 썰기 전 따로 부탁하면 듬뿍 받아먹을 수 있었던 ‘기름 고기’라 불리던 부위(아마도 차돌양지)와 종종 썬 대파를 깍두기 그릇에 담아 꾹꾹 누르고 고춧가루를 살살 보태 우거지까지 한입에 넣던 맛은 꿈에 나올 정도로 그립다. 성함도 채 못 여쭤본 두 할머니는 어떤 집안의 입맛 내력을 이었기에 그러한 맛의 조합을 자아냈을까. 장은 어찌 담갔고 고기는 어찌 골랐을까. 어떻게 동대문 상권 변두리 골목에 식당을 차리게 됐을까. 풀지 못한 궁금증만 뒤늦게 쌓여 있다.
나는 ‘노포’라 불리는 식당의 여성들에 대한 애틋한 감정이 있다. 내 이전 세대, 한국의 경제 부흥기를 남성들이 이끄는 동안 여성들은 가정에 속해 살림과 육아를 전담하는 것이 복 받은 천업인 것처럼 여겨졌다. 그 시절부터 식당을 했던, 지금의 노포 할머니들의 젊었던 날을 더듬어가 보면 가슴이 먹먹한 때가 많다. 교육의 기회도 흔치 않았고, 고소득을 보장하는 다른 기술을 익힐 여건이 주어지는 경우도 드물었다. 어떤 이유에서든 생계를 책임지게 된 여성들이 선택할 수 있었던 방편이라곤 ‘먹는장사’가 가장 가까웠을 것이다. 부엌살림 기술 하나밖에 가진 것이 없어 좌판이든 식당이든 닥치는 대로 먼저 돈이 보이는 것부터 해야 했던 절박함이 있었을 터다.
그 고단함을 생각하자면 그리고 그들이 자신도 모르게 만들어온 가치를 고려하자면, 노포 할머니에 대한 평가는 좀 더 격상돼야 한다고 생각한다. ‘식당 아줌마’, ‘이모’ 그리고 이제는 ‘할머니’라 불리는 그들 하나하나는 인생을 살아온 동안 자신도 모르게 한식의 재래 맛을 계승하고 있었던 식문화의 증거다. 아이러니하게도 그 시절의 여성들이 산업화 시대 뒷그늘에서 조명받지 못한 채 집에서 익힌 부엌살림 그대로 음식을 지었던 덕분에 생활 한식의 근대사가 보존된 것이다.
요즘의 젊고 세련된 외식사업가들이 내지 못하는 맛, 여느 집에서도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 가가호호의 규격화되지 않은 맛을 그들은 인생 내내 품고 유지해 왔다. 비단 유명한 노포가 아니어도, 동네 어귀 골목골목 오래된 그녀들의 식당 하나하나가 소중하다. 번듯한 직함 하나 없이 손에 닿는 거친 삶의 현장에서 이어진 맛의 내력을 그리고 그 성실한 삶의 태도를 나는 그들의 찬란한 노년으로부터 배우고 있다. 좀 더 존경받아 마땅한, 좀 더 값어치 있게 기억돼야 마땅한 그들의 인생이 우리에게 준 선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