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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의 결정적 순간
언제나의 지금
변종모 여행작가 2021년 07월호


“다시 여행자가 됐다.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가 됐다.”
눈발이 흩날리던 어느 봄날에 배낭을 꾸리듯 이삿짐을 싸서, 여기 볕 좋은 밀양의 어느 언저리로 왔다. 눈은 그치고 오후의 햇살이 눈의 편린처럼 날카로웠다. 반나절 만에 내가 살던 곳에서 마치 다른 세상에 떨어진 듯 모든 것이 새롭다. 새로우니 다시 시작된 것이다. 낯선 곳에서 새로운 삶을 결정하게 된 이유는, ‘불안’이었다.
내 안에 갇혀 움직이지도 않고 육중하게 자리 잡은 ‘불안’을 종식시키기 가장 좋은 방법은 내가 움직이는 수밖에 없다는 결론이었고 그렇게 결정됐다. 오래도록 여행자였다가 여행하지 못하는 나날에 봉착해 세상이 해결해 주기만을 기다리는 시간은 나를 자꾸만 늙게 했다. 세상에 치여 오래도록 나를 잃고 있었다. 건강하지 못한 생각과 튼튼하지 못한 일상들을 끌어안고 세상의 결정만 기다리던 날들, 이러다가 배낭을 짊어질 힘조차 남지 않겠구나 하는 생각에 겁이 났다. 그래서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는 마음으로 이사를 했다. 나를 옮겨 놨다.
이곳은 살구꽃이 만발한, 파키스탄의 북쪽 훈자(Hunza)마을보다 더 작은 마을이다. 그마저 도시로 나간 사람들이 벗어놓고 간 헌 옷처럼 껍데기만 놓인 집들이 많아 고요의 한가운데다. 그래도 그저 웃음이 났다. 그 웃음의 종류는 막막함일 수도 있고 새로운 기대일 수도 있겠다. 여기라면 생활과 여행이 한 몸이겠다. 복잡한 도시 속에서 하릴없이 버티며 여유롭게 하늘 한 번 쳐다보지 못했던 일상을 뒤집고, 세상이 주는 사소한 계절의 일거수일투족까지 면밀히 느끼며 사는 일. 때문에 무사하고 건강해졌으며, 이 나이에 튼튼할 기세다. 삶의 터전에서 더욱 멀어졌지만 아이러니하게도 더 깊숙한 여행자가 된 기분이다. 이를테면 세상에 뺏긴 직업을 되찾은 기분이랄까. 이국의 땅은 아니지만 아직 낯설고, 소통에 문제가 없지만 여전히 서툴다.
따지고 보면 안전하고 안락한 여행자가 있겠나. 그 어디든 안착하고 나면 그곳이 곧 삶이고 여행 아닐까. 할 일은 줄었지만 관심 둘 일은 많아져 좋았다. 수입과 지출이 함께 줄어드니 시간이 늘어났고, 그 시간의 행방은 타인이 아닌 오롯이 나의 결정으로 굴러가는 삶이라 원망도 없겠다. 새롭게 경험하는 모든 일에 관심을 두는 일이 여행자의 일이다. 잘한 일이다. 시절이 가져다준 가장 결정적 순간에 선택을 잘한 것이다. 자꾸만 좋은 쪽으로 생각이 기울어 끝내 좋은 자리로 남을 것이다.
산중의 깊은 밤, 지나온 지구 반대편의 일들이 친구처럼 곁에 눕는다. 당분간 여행하지 않는 여행자로 살겠지만, 아직도 아름다운 과거의 기억들이 내 안에 잘 살고 있다. 오늘, 낯선 이곳의 시간과 풍경이 어느 미래에 여전히 살가운 친구처럼 힘이 될 것을 안다. 다시 세상이 맑아지면 오늘의 힘으로 다시 배낭을 메겠지. 그때도 지금처럼 좋은 결정을 하겠지.
 자신이 처한 상황에서 가장 자신을 사랑할 수 있는 쪽으로 변해가는 것. 결정이란 찾아오는 것보다 내가 다가가는 일이 더 잦다. 그러니까 매 순간을 가장 결정적인 순간으로 알고 극진히 판단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 순간이 언제냐 묻는다면 ‘지금’. 나는 오늘도 내 인생의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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