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모바일 대메뉴명

KDI 경제정보센터

16개 경제부처가 만드는
국내 유일의 경제 정책 정보지

나라경제

발행물

칼럼

독서의 문장들
어쩌면 궁을 만나는 가장 재미있는 방법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1년 07월호


얼마 전 친구와 창덕궁 앞에서 만나 궁궐 산책을 함께 했다. 둘 다 코로나19 기저질환을 갖고 있는 처지여서 늘 조금 유난하다 싶게 조심을 하다 보니 카페나 식당처럼 마스크 벗은 사람들이 있는 밀폐된 공간이나 한강변처럼 인구밀집도가 높은 곳에서는 만날 엄두를 내지 못하던 차에 궁궐 데이트라는 묘수가 생긴 것이다. 역시, 궁하면 통한다더니.
사실 이 궁 데이트에 앞서 간단한 물밑작업이 있긴 했다. 친구에게 택배를 보내면서 그 안에 김서울 작가가 쓴 책 『아주 사적인 궁궐 산책』을 같이 넣은 것이다. 처음에는 “궁…?”하면서 다소 애매한 반응을 보였던 친구에게 “일단 읽어봐”라고 답한 지 하루도 지나지 않아 “너 다음 주에 궁 갈 때 나도 같이 가자”는 말이 나왔다. 내 그럴 줄 알았지. 나 역시 그랬으니까. 궁…? 솔직히 김서울이 썼다는 사실을 몰랐더라면 과연 이 책에 눈길을 주기는 했을까 싶을 정도로 평소 궁에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런 내가 최근에만 궁을 네 번 다녀왔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당장 궁에 가지 않고는 도저히 배길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친구와 궁 구석구석을 걸으며 괄호 안이 수시로 바뀌는 “이거 책에서 읽은 (   )다!” “맞네!”를 연발하는 궁 산책은 정말 즐거웠고 다음 달에는 경희궁을 함께 걷기로 기약했다. 이제 우리는 “궁!” 하면 통했다.

(…) 체스판 같은 오밀조밀한 박석 위로 올라서 있는 창덕궁 인정전을 보면 꼭 성을 지키는 킹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더군다나 이 박석 위로 왕과 문관, 무관이 국가 행사를 위해 열을 맞춰 한 치의 흐트러짐 없이 서 있었을 모습을 상상하면 그야말로 박석이 깔린 궁궐 앞마당 자체가 거대한 체스판이 아니었을까 한다. -p.75

전작들에서도 십분 발휘된 김서울의 남다른 상상력과 독특한 시선은 궁을 온갖 이야기와 작은 반전들을 품고 있는 다층적인 공간으로 뒤바꾼다. 이를테면 궁 안의 돌을 박석, 월대, 석수 등으로 나눠 설명하면서, 박석을 레드카펫과 체스판에, 월대를 테라스이자 베란다에, 석수 중에서도 해치상을 받치고 있는 단을 마약방석에 빗대어 위트 있게 풀어내는 식이다.
그래서 이 책을 읽고 궁에 가면 어쩐지 박석 위를 보무당당하게 걸어보게 되고, 잠 못 이루는 밤 가만히 달을 보고 있었을 몇백 년 전 사람들을 떠올리며 월대에 애틋하게 서보게 되고, 예전에는 궁에 와도 잘 들여다보지 않던 방 안을 둘러보며 저 벽지 아래 초배지로 깔려 있을 과거시험에 낙방한 사람들의 답안지(‘낙폭지’라고 부른다고 한다)를 떠올렸다가 갓 도배를 마친 궁궐 전각의 쌀+들기름+콩즙이 어우러진 고소한 냄새를 떠올리며 혼자 피식피식 웃기도 한다. 어느 날에는 책에서 슴슴한 평양냉면에 비교한 백골집(단청을 하지 않은 건물을 말한다), 그중에서도 창덕궁의 낙선재가 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낙선재 누마루 아래에 있는 빙렬 무늬 장식벽이 너무 보고 싶어서 오직 그것을 보러 궁에 가기도 했다. 요즘에는 암막 커튼 역할을 한다는 흑창이 갑자기 보고 싶어 다음에 가면 그것부터 찾아볼 예정이다.
아직 궁 속 보물찾기 여정이 무궁무진하게 남아 있다는 사실이 굉장히 든든하다. 몇 년치, 아니 십몇 년치 희열을 적립해 둔 기분이랄까. 책을 읽기 전만 해도 ‘생기 하나 없는 세계’였던 궁을 ‘생기 넘치는 세계’로 살려낸 이 에어프라이어급의 책을, 김서울이라는 근사한 안내자를 곁에 둘 커다란 행운을, 부디 하루라도 빨리 만나시기를!
KDI 경제정보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