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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씨앗
여성의 성공은 섬세함 때문인가?
오찬호 『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저자 2021년 07월호


차별이 넘쳐나는 세상에서 차별을 극복했다는 이야기는 언제나 훈훈하다. 세상의 편견을 이겨냈으니 감동적이다. 학력차별이 심각한 만큼, 지방대 출신이지만 대기업에 합격했다거나 고졸이지만 밑바닥에서부터 차근차근 올라와서 성공했다는 아무개의 파란만장한 일대기는 주목받는다. 성차별도 마찬가지다. 특정 성별이 돌봄 노동에 지쳤거나 유리 천장이라는 가혹한 진입장벽에 힘겨워할수록, 그럼에도 일과 육아를 포기하지 않고 보란 듯이 천장을 깨트렸다는 어떤 이의 고군분투가 이슈가 된다.
바늘구멍을 통과한 예외를 “사회 탓하지 마라!”는 자신의 철학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써먹는 나쁜 경우도 있겠지만, 대부분은 좋은 의도로 언급했을 것이다. 절망보다는 희망을 바라보자는 선의이자, 하늘이 무너져도 솟아날 구멍이 있다는 격려 아니겠는가. 하지만 악의 없는 위로가 사회가 좋은 방향으로 나아가는 걸 보장하진 않는다. 오히려 기존의 고정관념을 강화하기도 한다. 지방대의 기적, 신화 어쩌고의 이야기들이 학력차별은 별 수 없다는 전제에서 출발하는 것처럼 말이다. 더 성실했고, 더 이를 악물었다는 표현들은 차별과 싸우는 게 아니라 적응 중이라는 의미다. 노골적으로 말해, ‘공부 못하면 몸이라도 부지런해야지’라는 차별적 시선을 인정하는 데 모두가 익숙하다는 말이다.
성차별이 완만해지고 있다는, 그러니까 여성이 ‘배제되는’ 사회적 틀이 변화하는 현상을 분석할 때도 고정관념을 강화하는 실수가 기어코 등장한다. 최근 방송계에서 드라마 연출을 맡은 여성 PD가 증가하는 현상을 고무적으로 평가하는 기사를 읽었다. 좋은 현상임은 자명한데, 이런 식으로 시대변화를 읽어내는 기사들은 예외 없이 여성을 ‘여자만의 특성을 지닌’ 존재로 다시 규격화한다. “여성이 더 잘 표현할 수 있는 감성과 결이 장점으로 부각”, “협업이 더욱 중요해졌기에 여성 특유의 소통 능력이 빛을 발하는” 등의 부연 설명이 반드시 동반된다.
이는 지금껏 여성을 상징하는 너무나도 전통적인 스테레오타입 아닌가. 이것과 여성이 회사에서 고위직으로 승진할 때마다 “엄마의 자상함, 여성의 섬세함이 무기였다”는 인터뷰가 등장하고 언론은 이를 마치 유리 천장을 ‘깬’ 사례처럼 포장하는 건 과연 다른 경우일까?
섬세하고, 감성적이고, 소통 능력이 좋다는 말이 무엇이 문제냐고 하겠지만 그런 이미지는 ‘돌봄 노동’에 특정 성별이 더 적합하다고 느끼게 하는 핵심 연료가 된다. 또한 듣기엔 좋아 보이는 저 수식어들이 결정적일 때마다 얼마나 자주 여성을 배신했던가. ‘지나치게 섬세해서’, ‘지나치게 감성적이라’, ‘지나치게 소통에만 집착하다가’ 중요한 일을 그르칠 수 있다는 편견의 씨앗이 여전히 일상과 일터에서 성차별의 강력한 근거로 작동되고 있으니까 말이다. 각자 자신의 삶에서 섬세한 여성, 감성적 여성, 소통을 중요시하는 여성을 자주 목격했겠지만 그건 ‘결과’다. 투박하게 빚어져 강제적으로 마주해야 했던 ‘여성의 틀’(여자다움)에 적응하고 살아야만 했던 누군가의 모습을 생물학적 특성, 자연적 이치로 믿어서야 되겠는가. 그럴수록 이런 일에 적합한 남성, 어울리지 않는 여성이라는 편견은 커진다.
성별 차이가 있긴 있을 거다. 모성애와 부성애가 다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게 현대사회의 육아와 일에 성별에 따른 적합도가 확연히 다름을 뜻할 순 없다. 누구는 진화의 관점에서 남자들이 사냥할 때 여자들이 아이를 돌보게 됐다고 하지만, 우리는 매머드를 잡으면서 살지 않고 지금이 사바나 초원 시대도 아니다.
“여성의 섬세함이 빛을 발휘”한다는 관성에 기댄 분석은 어딘가에서 “이런 일은 섬세한 여성이 해야지”라는 말을 부유케 한다. 물론 그 반대편에선 “남자들이 이것도 못 하냐!”는 핀잔에 힘들어하는 특정 성별이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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