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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농부의 손길이 담긴 채소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21년 07월호
 


 


“여름 풋채소편과 허브박스를 올려뒀어요!”
충남 홍성 ‘채소생활’ 농장의 인스타그램은 불시에 판매 고지를 한다. 새 포스팅 알람까지 설정해 두고 ‘언젠가 이 집 채소를 꼭 살 테야’ 하고 다짐하고 있지만 번번이 실패한다. 대개는 몇 분 만에 동난다고 한다. 몇 초 안에 끝나는 채소도 있다. 경기 남양주의 ‘준혁이네 농장’이 운영하는 카카오톡 오픈채팅방에도 불시 판매 공고(?)가 올라오는데, 여긴 딱 0.1초 만에 손을 들지 않으면 채소를 살 수 없다. 농장에서 판매하는 양은 고작 3세트인데 오픈채팅방에는 104명이 줄을 서 있으니 나처럼 굼뜬 사람은 지붕만 쳐다보는 개 신세다.
요즘 채소 사기가 BTS 콘서트 예매 ‘피케팅’(피 튀기는 티케팅) 못지않다. 언제든 스마트폰 탭 몇 번이면 지천에 널린 게 채소인데, 왜? 특별한 농부가 손수 파는 특별한 채소를 사는 일이 어렵기 때문이다. 서울·경기권 위주의 작은 농장들 그리고 지방 곳곳에도 드문드문 터전을 잡은 다품종소량생산 농장들이 스타가 돼 있다. 토종 작물을 위시해 허브는 물론 신기한 서양 작물도 다양하다. 지금 같은 계절에는 토종 고수, 스노우피(snow pea) 콩깍지와 래디시(radish), 패티팬(pattypan) 호박이 피케팅 대상이다.
‘농부시장 마르쉐@’ 등 오프라인 파머스 마켓에 참석하면 원하는 채소를 그나마 안정적으로 살 수 있었는데, 최근 들어서는 그마저도 쉽지 않아졌다. 역시 굼뜬 탓인데, 11시 개장에 맞춰 가지 않고 나처럼 12시 반이나 돼서 어슬렁어슬렁 나타나는 인간은 기껏 준비해 간 커다란 장바구니에 담아올 것이 많지 않다. 지난달 마르쉐@에 그렇게 뒤늦게 갔더니 래디시라곤 ‘파치’ 딱 네 알만 남아 있어서 1천 원 내고 그거라도 감지덕지 건져 와야 했다. 오프라인 파머스 마켓도 이제는 ‘오픈런’이 필수다. 나이키 한정판 신상품이 나오는 날 매장 앞에 새벽부터 줄 서듯 부지런해야 승리자가 될 수 있다.

맛의 가치를 아는 사람에게 받는
푸근한 선의의 마음

차라리 잘 사지 못하는 게 다행이긴 하다. 1인 가구인 나는 ‘직업상’이라는 구실로 원래 쓰던 작은 냉장고가 사망하자마자 신나게 투도어 냉장고에 김치냉장고까지 장만한 바 있다. 좁은 부엌을 위압적으로 가득 채운 이 냉장고들은 기실 음식물쓰레기 대량생산 역할이나 담당하고 있는데, 무기력과 가상의 바쁨을 내세워 자꾸만 사둔 재료를 방치하고 결국 때를 넘겨버리는 악습관 때문이다. 한 번씩 냉장고 정리를 하다 보면 스스로 한심할 정도다.
감자는 그럭저럭 먹을 만했다. 싹을 도려내고 푸르게 물든 부분을 제거하고 보니 모두 반쪽이 돼버렸지만. 당근은 처참한 몰골이었다. 잔뿌리를 수백 개씩 내며 어떻게든 버텨보려 했던 것 같다. 오이가 구멍 없는 비닐에 담겨 오는 것은 항상 다행이었다. 아삭한 제때 먹기보단 채소칸 바닥에서 엄청난 악취를 풍기는 물주머니를 발견할 때가 더 많으니까. 오이를 오래 방치하면 흐물흐물하게 녹아 고약한 푸른 액체가 된다는 걸 부끄럽지만 나는 알고 있다.
좀 이상한 얘기지만, 대형마트나 동네 슈퍼마켓에서 사 온 채소가 썩는 것은 그리 마음 아프지 않다. 소중한 음식을 썩혀 버리는 것에 대해 당당하다고는 말 못 하지만 ‘아이고 오이가 또 물이 됐네?’ 하며 버리면서 스스로 좀 한심하게 여기는 정도지, 반성하거나 죄책감까지 느끼진 않는다. 왠지 오이 정도야 똑같은 오이를 또 살 수 있으니 다음엔 꼭 아삭하게 잘 먹으면 거리낄 것 없다는 생각으로 살고 있다. 3개에 2천 원짜리 오이에조차 사사건건 회개를 바란다면 분명 신도 지칠 것이다.
이 위선적이고 비논리적인 이중잣대 사고방식은 무엇인가, 문득 생각해 본 적이 있다. 사고 싶어서 안달인 특별한 채소를 사면 그토록 기쁠 일이면서, 그냥 있으면 먹겠지 싶어서 산 흔한 채소는 왜 홀대하는가 말이다. 답은 농부에 있었다. 조금 미화하자면, 새벽부터 묻힌 흙색을 채 빼지 못한 채 택배 포장을 하고 시장에 나선 농부의 손이 있고 없고의 차이였다. 뒤늦게 보게 되는 인스타그램 포스팅에도, 오픈채팅방에 올라오는 무뚝뚝한 공지 카톡에도, 파머스 마켓에서 채소를 담아 주는 손길에도 모두 사람의 이야기가 있어서였다. 그 너머의 ‘인간’이 작물을 맛있게 키우기 위해 어떤 성의를 담았는지, 흙 묻고 벌레가 숨어 있는 작물을 어떤 마음으로 씻고 다듬었는지를 채소를 사기 위해 그 농부를 만나고 소통하며 알게 되기 때문이다. 모두에게 낯설지만, 자신은 맛의 가치를 알기에 작물을 소개하고 권하는 푸근한 선의의 마음이 전달되기 때문이다.
내가 오이를 만날 썩혀 내다 버리는 것은 그 오이가 맛도 맛이지만 편의점 과자처럼 저절로 무심하게 만들어진 것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다. 거대하고 복잡한 유통망 너머에는 비록 대량생산이나마 그 오이를 돌보고 수확한 사람들이 있을 텐데, 큰 시스템 안에서 그저 하나의 재화에 지나지 않아 보이는 오이로부터는 그 숨결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있어서다. 오이 세 개를 오이 세 개가 아니라 그저 돈 주고 산 물건, 언제든 또 살 수 있는 물건으로 여기니 그리 소홀히 취급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새벽 배송으론 맛볼 수 없는 새로운 맛…
생생한 밭 이야기는 덤

재화로 여기자면 편리하게 언제든 어디서든 살 수 있는 채소를 굳이 농부로부터 더 어렵고 까다롭게 사는 일은 무척 번거롭고 고까운 일이지만, 분명한 보람이 있다. 앞서 얘기한 심정적인 밀착감 외에도 실리적인 이득도 얻을 수 있기에 수고를 마다하지 않게 된다.
맛이 한결 좋다는 점이다. 빨리 많이 길러내는 것이 목표인 시스템 안의 채소는 거칠게 구분하자면 맛은 다소 포기했다. 그러나 이들 농부의 채소는 비효율적이더라도 최소한의 인위로 원래 채소가 가진 맛을 최대한 진하게 품게 하는 농법으로 각기 자라난다. 유기농, 무농약 채소라서가 아니라, 농부가 맛을 고민하며 자연의 맛을 최대한 끌어낸 채소이기에 맛있다.
흔치 않은 맛, 새로운 맛이라는 점도 큰 보상이다. 긴 이야기를 짧게 하자면, 이 작은 농부시장은 현재 종자 경쟁 판도다. 한국의 토종 작물을 발굴하기도 하고, 외국의 종자 중 한국 풍토에 맞는 것을 탐색하면서 조금이라도 더 색다른 허브와 채소를 소비자에게 소개하려는 움직임이 활발하다. 같은 오이여도 비린내나 물맛 없이 고소한 맛이 단단한 질감으로 꽉 차 있는 외국 종자 오이, 같은 애호박이어도 샛노란 껍질에 탄탄한 근육질 속살을 가진 외국 종자 애호박, 또는 같은 완두콩이라도 콩뿐 아니라 콩깍지와 콩꽃, 콩덩굴까지 모두 연하게 먹을 수 있는 토종 종자 완두 등 편리하게 쓱 도착해 있는 새벽 배송으로는 구할 수 없는 새로운 맛이 지천이다.
제철을 누리는 즐거움도 큰 몫을 한다. 가온시설 재배를 하는 농부가 흔치 않아 오로지 자연의 때에 맞는 채소가 자연의 때에 맞는 충만한 맛을 뽐내고, 철이 지나면 또 내년을 기약하는 시간을 느낄 수 있다. 오픈런과 피케팅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개인적으로 알고 지내는 한 농부의 꾸러미 구매에 성공해서 재사용 스티로폼 박스 가득 채소를 받았다. 몇 종류의 래디시에 잎까지 알차게 먹는 꼬마 당근, 토종 마늘 몇 종류에 야구공같이 단단한 양파, 화려하게 피어난 상추류 잎채소에 고소한 루콜라와 열매 맺힌 토종 고수에 수레국화꽃, 쪽파꽃까지 풍성한 수확이 담겨 있었다. 각각 어떻게 먹는 것이 좋은지, 어떤 특징을 갖고 있는지 생생한 밭의 이야기까지 덤으로.
평소엔 채소를 봉지째 그대로 넣어두지만, 농부의 채소는 언제라도 꺼내 먹을 수 있는 상태로 받자마자 밑 손질을 한다. 바로 소비하지 못할 것 같은 잉여 분량은 부지런하게 바로 피클이나 장아찌를 담기까지 한다. 맛있게 먹겠다는 의지가 충만해 손길에 기력이 넘치고, 어떤 바쁜 일이 있어도 농부의 채소를 손질할 시간은 낼 의지가 있다. 오늘은 이걸 이렇게, 내일은 저걸 저렇게 해 먹어야지 생각하면 사는 게 다 즐거울 정도다. 우울은 수용성이라던데, 채소를 씻는 만큼 무기력함도 씻겨나간다.
종일 손에 물을 묻혀가며 농부의 채소를 다듬다 문득 내 냉장고를 거쳐간 숱한 오이들을 떠올린다. 이 성의의 반의반만 했어도 오이를 그렇게 썩혀 버리진 않았을 텐데. 오이들아, 미안하다. 그래도 어쩌겠니? 차별대우도 때론 합당한 이유가 있는 거란다. 너희를 내가 다시는 사지 않을 테니 다음 파머스 마켓 오픈런 성공이나 빌어주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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