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신이란 새로운 기술을 도입하고 자금을 투자해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업(業)’을 만들어내는 일이다. 현재 발 딛고 있는 현장에서 전통의 것으로 새로운 ‘전환’을 이뤄내는 것도 혁신이다. 경상남도 창원시는 우리나라 산업의 발전 과정을 명확하게 보여준다. 선진국을 추격하는 성장 전략하에 ‘기계’라는 품목으로 50여 년간 산업을 지탱해 온 창원시가 ‘스마트 전환’이라는 메가트렌드를 맞아 어떻게 대응해 나가고 있는지, 창원시의 전환에는 어떤 모멘텀이 작동하고 있는지 그리고 이런 전환이 우리 경제 전체에 적용될 수 있는 모델인지 질문을 던져본다. 이를 통해 또 하나의 지역발전 전략을 접할 수 있다.
한국 기계공업의 요람, 창원
창원은 2021년 7월 현재 인구 100만 명이 넘는 공업도시로, 2010년 마산시·진해시와 통합해 경남 제1의 도시가 됐다. 경제 규모로도 경남 1위다. 경남 지역의 총생산이 연간 108조 원인데, 창원이 54조 원이다. 이 중 50조 원을 창원국가산업단지(이하 창원산단)에서 창출하고 있다. 명실공히 창원산단은 경남의 대표 산업현장이다.
창원산단은 1970년대 초 국산무기 제조 기계공장으로 출발해 방위산업과 중화학공업의 요람으로 성장했다. 지난 50년간 산업화와 지역경제 성장을 견인해 왔으나, 이후 노후화 단계에 접어들었고 2017~2018년에는 러스트벨트(펜실베이니아 등 미국 북동부 지역과 같이 제조업 호황을 구가하다 제조업 사양화 등으로 불황을 맞은 지역)라는 말까지 나돌 만큼 침체에서 반등하지 못하면서 제조업 혁신이 절실해졌다.
새로운 모델 창출이 요구되는 상황에서 산업통상자원부는 2019년 ‘스마트산단 선도 프로젝트’를 실행한다. 이에 ‘경남창원스마트산단사업단’이 꾸려졌고 박민원 창원대 교수가 사업단장을 맡았다. 박민원 단장은 지난 2년을 ‘기계에 ICT를 입히는’ 과정으로 축약했다. 제조업만 있던 지역에 SK, KT 등 IT 기업을 끌어와 제조업·IT 융합 사업을 추진하고 지역 기업의 참여를 유인하기까지 쉽지 않은 과정의 연속이었다고 한다. 2019년 기준 창원산단 소재 2,600개 기업(대기업 44개 포함) 중 30인 이상 사업장 700개사를 스마트화 대상으로 삼고, 우선적으로 10%에 해당하는 70개사에 스마트공장 보급·확산 사업을 실시했다. 2030년까지 스마트공장 총 1,500개를 보급할 계획이며, 이와 함께 청년 고용 3천 명을 창출하고 매출액을 10조 원 증가시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 지난 2년 동안 창원산단은 ICT 기업 200개를 유치했고 매출도 11% 늘었다고 한다.
박 단장은 인력양성 사업의 일환으로 창원대에 제조융합과를 만들었다. 지역인재를 키워 가시적 성과를 내야 한다는 그의 철학이 반영된 것으로, 올해 수시에서 합격자 내신 평균이 1.6등급일 만큼 인기가 많았다. 박 단장의 사업단 운영 핵심 키워드인 ‘청년’과 ‘선순환’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창원의 지역인재 유출을 막고, 이들이 정착할 수 있도록 선순환 체제를 만들겠다는 것이 박 단장의 비전이다.
Interview 1 박민원 경남창원스마트산단사업단장
창원의 기업인들 분위기는?
창원공단이 1974년에 만들어졌다. 그때 활동했던 1세대들은 60대를 지나고 있는데, 1세대의 자녀들, 즉 2세 경영인들에게서 희망을 봤다. 이들은 자주 모여 “우리 한번 해보자. 변화는 분위기가 만든다.” 라고 외치곤 했다. 이런 2세대 기업인들에서 태림산업 같은 등대공장도, 이제는 조 단위 기업이 된 센트랄도 나왔다.
창원산단은 잘나가던 기계단지에서 러스트벨트로 전락, 다시 스마트화로 모멘텀은 잡았는데 지속 가능한가?
기계공업 기반의 ICT·플랫폼 유니콘 기업을 탄생시키는 것이 전략이다. 데이터나 AI 기술이 주로 금융·식품 서비스 등 실생활에 몰리는데, 제조에 AI가 결합하면 가능성이 무궁무진해진다. 제조 AI 분야에서 몇몇이 창업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이 유니콘 기업으로 성장하면 그다음에는 데이터를 담보로 대출해 주는 단계가 될 것이다. 스마트공장에 쌓이는 어마어마한 데이터 중 정제된 데이터가 자본이 될 수 있다. 여기에 AI나 플랫폼 기업이 들어와 또 다른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낸다면 이 성장 모멘텀은 지속될 것이다.
유니콘 기업 탄생에 애로가 있다면.
관료나 공공기관 종사자의 사고가 좀 더 유연해져야 한다. 제조업이 우선이다 보니 IT 기업이나 벤처의 요구에는 반응이 느린 편이다. 과감한 발상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 ICT나 플랫폼 관련 연구용역 등이 필요할 것이다. 민간전문가가 참여하는 IT혁신부서도 생각할 수 있다.
기계산업을 통한 무한확장은 어려워 보이고, 경남엔 지식창출센터도 부재한 것 같은데.
핵심 주체는 기업이다. 지난 2년간 ICT 업종을 중심으로 기업 200개가 늘었는데, 이 분야에서 유니콘 기업 성공스토리가 나오도록 해야 한다. 이때 정부가 어떤 틀을 만들어 지원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경영을 잘하는 기업이 플랫폼도 잘한다. 스마트그린산단 프로젝트로 태림산업 내에 짓고 있는 ‘개방형 모델’ 벽면에 MDCG(Manufacturing Data Community Ground)라는 용어가 쓰여 있다. 플랫폼을 만들어 온라인으로 지원할 수는 있으나 실제로 제조 데이터를 보여줄 수 없는 게 문제였다. 그래서 누구든 와서 보고 그것으로 사업화할 수 있도록 제조 데이터 관련 소통 공간을 만들고자 했다. 창원엔 경험 있는 좋은 기업이 많다. 기업 스스로 연구하고 찾아보다 필요한 걸 구체적으로 정부에 요구하라고 조언한다. 결국은 사람이, 사람의 생각이, 경험 있는 사람의 생각이 핵심이다.
중소·중견기업의 등대로 인정받은
태림산업
불빛으로 방향을 알려주는 등대처럼 제조업의 미래를 이끌 공장이라는 의미로 세계경제포럼(WEF)은 글로벌 등대공장을 선정한다. 중소벤처기업부는 이를 벤치마킹해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K스마트등대공장 10개를 선정했다. 3개가 중소기업인데, 그 중 하나가 태림산업이다. 태림산업은 자동차 조향장치 부품을 소품종 대량생산 체제로 생산해 보쉬, ZF 같은 스티어링 시스템 회사(2차 벤더)에 납품한다. 생산품의 약 80%를 수출하고, 수출품의 90% 이상이 ZF라는 독일회사를 통해 전 세계 11개국에 공급된다. 폭스바겐부터 페라리, 테슬라 차량에도 태림산업의 제품이 들어간다.
태림산업은 1986년 설립된 업력 35년의 기업이다. 오경진 태림산업 부사장에게 스마트공장의 핵심이 무엇이냐고 물었다. 그는 ‘문제 해결’이라 답한다. 로봇 설치나 불량 감소만을 생각하기 쉬운데, 문제의 인식, 정의, 분석, 활동, 진단 등 문제 해결의 각 단계에 개별 회사의 여건에 맞게 적정 기술을 투여하는 것이 스마트공장이라는 것이다. 예를 들면 스마트공장을 통한 ‘적정 품질’이란 불량률 제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고객이 원하는 적정 수준의 품질과 가격의 밸런스를 데이터 등을 활용해 결정하는 것이다.
태림산업은 스마트화를 단계별로 접근했다. 한꺼번에 공장 전체를 하나의 솔루션으로 자동화하는 것이 아니라, 제품 생산과 매출 확대에 맞춰 디지털 기술을 도입하는 방식이다. 따라서 현재 생산부서를 고도화 단계별로 생산1과에서 2과, 3과로 나눠 운영하고 있다. 생산1과는 기존 생산 방식을 유지하고, 생산2과는 유연한 대처가 가능한 수준에서만 스마트 방식을 쓰고, 생산3과는 ‘설계의 완벽’을 최종 목표로 하는 가장 앞선 스마트 방식을 사용한다.
Interview 2 오경진 태림산업㈜ 부사장
중소벤처기업부 K스마트등대공장으로 선정됐는데.
태림이 지난 6월 말 K스마트등대공장에 선정된 것은 자신감을 갖고 공격적으로 투자했던 게 주효했다. 지난해 9월 대통령이 창원산단을 방문하며 이곳을 다녀간 후 태림이 더 유명해졌다. 최근 테슬라, 폭스바겐의 수주를 받은 일도 태림의 자랑거리다. 각종 디지털 기술이 완비된 스마트공장을 기업 경영자들이 다녀와서는 ‘돈 있으면 나도 하지’라며 동기부여를 받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태림은 ‘저 정도면 나도 하겠는데’라는 느낌을 준다. 로봇 기술보다는 전통 기술을 데이터와 IT 기술과 잘 융합한, 사람 냄새 나는 제조공장이다. 태림에 연간 600~700명 정도 방문한다. 오프라인 현장에서 실제로 데이터가 어떻게 쓰이는지 볼 수 있고 누구든 ‘나도 해보겠다’는 동기부여를 받을 만한 모델이 있어야 한다고 해서 산단에서 개방형 모델을 지원했다. 7월 말 오픈 예정이다. 건물의 테마가 ‘전환’이어서 완벽하게 예쁜 건물로 짓기보다는 기존의 건물을 리모델링하고 있다.
태림은 어떻게 기계산업에 뛰어들었나? 처음부터 수출을 지향했나?
1970년대 후반이 창원이 기계산단으로 발전했던 시기였다. 지금 비트코인에 투자하듯 그때 최고의 투자는 기계로 업을 하는 것이었다. 이 지역에서 영업하는 방법이 품목보다는 장비를 갖고 하는 것이었을 거다. 술 한잔 안 먹으면 기계 한 대 사고, 기계 한 대 사면 돈 버는 세상이었다. 1980년대 후반 대기업 수직계열화가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태림은 억울한 일을 많이 당했다. 결제 조건을 얘기했다가 물량이 한번에 끊긴 적도 있다. 살아남는 방법은 수출밖에 없었다. 목숨 걸고 해외고객을 찾지 않으면 물건을 못 파는 상황이었다. 우리와 같은 입장에서 스스로 경쟁력을 찾은 회사가 경한코리아, 센트랄 등이다. 또 당시가 미국 자동차 업계에서 아시아의 주요 협력업체들을 찾던 시기였다. 태림은 그동안 미국시장에서 로컬라이제이션돼 있던 제품을 국내에서 처음으로 자사화해 수출했다.
태림에서 만드는 부품을 전기차·수소차에도 쓸 수 있나?
2010년을 기점으로 기계식 조향장치 시장은 급격히 사라지고 전자식 조향장치로 전환됐다. 태림도 기술 개발과 제품의 전환이 없었다면 시장에서 사라졌을지도 모른다. 이제는 전자식 조향장치에 들어가는 부품이 매출의 90% 이상일 만큼 사업 전환을 성공적으로 이뤄냈다. 과거 세계시장 점유율 약 10%를 차지할 만큼 조향장치 부품을 잘 만들던 회사가 앞으로 다가올 미래차에 대비해 10년 정도 투자해 가며 배운 것이다. 2019년 제품수주를 하면서 2020년 매출 계획이 당초보다 30~40% 이상 증가했다. 자율주행차도 문제없다. 일반 자동차를 보면 초기에 부품의 품질이 최상이지만 10만km쯤 타면 성능이 점점 떨어진다. 그런데 자율주행차는 소프트웨어가 작동하는 방식이다. 초기에 비해 품질이 떨어지게 되면 노이즈도 많고 프로그램이 해야 할 일도 많아진다. 그래서 지금은 초기품질이 좀 낮더라도 품질이 유지되는 기술을 선호한다. 태림 제품이 스위스 제품을 이길 수 있었던 요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역설적이게도 우리의 전통 기술 자체가 AI를 서포트해 주는 것이다.
어떻게 공정 혁신을 했나?
‘스마트공장’ 하면 전산팀을 우선 생각한다. 그런데 태림은 운영혁신팀을 꾸려 낭비를 관리해야 하는지, 설비의 밸런스를 관리해야 하는지 등의 문제를 찾고, 이를 기반으로 경영지능화팀에서 아날로그가 낫다 또는 클라우드로 가자, 프로그램을 사자 등의 판단을 한다. 무조건 4차산업 기술만 고집하는 것이 아니다. 많은 중소기업이 솔루션에 의지해 큰 ERP(전사적자원관리) 시스템 하나 들여놓고 거기에 자기 몸을 끼워 넣는 경우가 많다. 기존에 해온 것처럼 먼저 종이로 한 일들을 잘 기록하고, 스마트공장으로 우리 입맛에 맞게 만든 이 형태가 태림의 동력이자 혁신이다.
직원들은 스마트공장을 잘 받아들였나?
태림은 원래부터 기록하는 일을 잘했다. 장비가 회사의 자산이다 보니 비가동 시간표라는 양식이 있다. 그것을 전산화하니 장갑을 안 벗어도 되고 일하는 방법도 선진화됐다. 많은 회사에서 반발이 있는 이유 중 하나는 원래 안 하던 일을 새로운 기술로 하게 만들어서다. 단위공정에서 경쟁력을 높이기 위해 사람을 쓸지 로봇을 쓸지는 상황에 따라 판단하는 것이다. 말레이시아, 중국 같은 곳이 스마트공장과 로봇에선 우리보다 앞선다. 지금 고생해서 따라가지 않으면 산업 자체가 없어질 수 있다. 이런 위기의식을 공유하고 직원들을 독려한다.
‘현장’과 ‘사람’이 스마트 전환의 핵심
최근 창원산단은 반도체 수급 문제에 따른 타격이 코로나19로 인한 것보다 더 커 그 손실이 30~35%에 이른다고 한다. 태림산업의 브라질 공장의 경우 6개월째 셧다운 상태다. 우리나라 산업 발전 과정의 명암을 동시에 볼 수 있는 대목이다. 글로벌 공급망 재편과 팬데믹 상황 속에 대처해 나갈 수 있는 혁신적 비즈니스 모델을 찾아내야 하는 과제가 기업에도, 국가에도 던져졌다.
창원의 ‘전환’ 스토리를 만들어가고 있는 주체는 역시 ‘사람’이다. 기초체력을 갈고닦고 그 위에 ICT 옷을 입으니 글로벌시장에서도 통한 것이다. 산단을 스마트 ‘전환’하기 위한 사업을 펼치면서 박민원 단장은 현장 관계자들로부터 스마트화가 일자리 감소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도 들었다고 한다. 또 기업에 직접적 수익을 가져오지 않는 개방형 모델 사업을 왜 맡아서 하는가라는 질문에 오경진 부사장은 노하우를 공유해 지역사회가 성장하면 그것이 결국 태림산업의 경쟁력이 된다고 했다. ‘지역 재생’의 길을 모색하기 위해 ‘지역 상생’을 택하고 지식과 경험을 공유하며 ‘등대’로서 길을 밝혀주는 이들은 혁신가로 불리는 데 손색이 없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