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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박스째 즐긴 지난여름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21년 09월호


8월 현재, 사회적 거리두기 4단계가 이어지고 있다. 마침 정확히 폭염의 시기와 때를 같이했다. 다시 외식하지 않고, 집에서만 먹었다. 오히려 좋은 타이밍이었다.
여름엔 뭐든지 크다. 온기도 많고 물기도 많으니 밭에서 오는 것들이 무럭무럭 자라다 못해 거대해진다. 게다가 여름의 제철 식재료는 왠지 박스로 사게 되는 함정이 있다. 제철의 것을 먹지 않고는 계절을 나지 못하는 직성에 또 거대한 여름 먹거리들을 신나게 사 냉장고에 가득 채웠다.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겁지만
달곰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시작은 감자였다. 대형마트나 새벽배송, 동네 슈퍼마켓 등 일반적인 루트로 감자를 산다면 거대해질 일이 없다. 한두 알만 골라 담아도 되니까. 대신 품종은 수미 감자로 고정이다. 갓 수확했을 때는 분이 가득 올라와 파삭하고, 저장해 두면 쫀쫀한 질감이 더 강해지는 중간 성질 감자다. 1년 치 밥상을 도맡는 전천후 감자 품종이다.
여름 제철엔 감자도 다양하게 맛을 볼 수 있다. 수미가 대세 품종으로 자리 잡기 전 ‘옛날 감자’의 대표 격인 남작 그리고 남작을 대체하는 두백 감자가 있다. 옛날 감자란 엄마 손을 붙들고 다녀온 재래시장에서 갓 사 와 냄비에 소금, 설탕 간을 해서 푹 찌면 포슬포슬하게 분이 올라오는 감자를 말한다. 갓 찐 감자를 열어보면 껍질이 다 터질 정도로 분이 넘쳐나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런 감자를 분질 감자라고 한다.
“앗뜨뜨”하며 채 식지도 않은 감자에 성급하게 달려들어 껍질을 벗겨내고 한입 가득 먹으면 입천장이 델 정도로 뜨겁지만 달곰하고 고소한 맛이 입안 가득 터진다. 씹을 것도 없이 입안에서 터져버려 사르르 분이 퍼진다. 이 맛을 어찌 잊으리오.
품종을 가려 먹는 유별난 식성의 소유자로서 항상 서운한 것이 품종을 딱 집어서 뭘 좀 사고자 하면 별수 없이 농가 직거래로 박스 구매를 할 수밖에 없는 유통구조다. 결론은 올해도 분질 감자를, 올해는 남작으로 또 한가득 사서 찌고 삶고 신이 났었다는 이야기다.
특히 가루가 잘 터지는 분질 감자로 달걀과 오이, 양파를 섞은 감자 샐러드를 만들면 세상에 둘도 없는 맛이 되는데, 포인트는 양심을 잠시 내려놓고 듬뿍 짜 넣는 마요네즈다. 한 양푼 가득 감자 샐러드를 만들어 흰 식빵에 두툼하게 얹어 먹는 그 각별한 맛이라니! 굵은 소금에 15분가량 절여 물기를 짜낸 여름 오이의 ‘꼬득꼬득함’도 감자 샐러드의 중요한 포인트다.
옥수수 또한 박스 구매 외에 방도가 없다. 일반적인 루트로 구매하면 5개 3천 원 하는 식으로 살 수야 있지만, 일반 유통망을 탄 옥수수의 맛은 제맛의 절반도 채 되지 않는다는 점. 간과하기 쉬운 사실인데, 옥수수도 우유만큼 콜드체인 유통이 권장되는 농산물이다. 딱딱해지기 직전 절묘한 때에 수확한 옥수수를 바로 삶은 것이 제맛의 100%라면, 그것을 다음 날 아침 택배로 받아 바로 삶은 것은 90%다. 이때 옥수수는 껍질째 수확한 것이어야 하고, 껍질 안에 펭귄 다리처럼 숨겨져 있는 옥수수 줄기도 최대한 길게 남긴 것이어야 수분과 당분을 최대한 유지할 수 있다. 그렇다. 수분과 당분이다.
갓 수확한 옥수수는 찰옥수수라도 당분이 높다. 이 맛난 당도가 수확 후 시간이 흐를수록 전분으로 변화하며 단맛이 떨어져 설탕, 뉴슈가 등이 필요해지는데, 그 마음 급한 시간을 세월아 네월아 하며 보내는 일반 유통 옥수수가 딱 그 경우다.
매년 수확기마다 안부를 묻는 옥수수 농가의 옥수수는 받은 아침부터 분주하게 삶았다. 껍질을 길게 많이 남기니까 쓰레기도 많이 나오고 손질하는 수고도 껍질 다 깐 옥수수에 비해 번거로운 것이 당연하지만 거실 바닥에 앉아 옥수수 껍질을 좍좍 벗기는 동안에 나는 옥수수가 이미 맛있다. 뽀얀 상아 같은 찰옥수수가 꺼끌거리는 껍질 속에서 모습을 드러내면 옥수수가 다 삶아진 40분 후를 미리 시뮬레이션한 듯 입안 가득 침이 고이는 것이다. 당분을 잘 간직한 옥수수는 그만큼 신선해서, 옥수수가 내야 할 본연의 향 또한 지키고 있다. 이미 끓고 있던 솥에 옥수수를 삶는 40분이라는 영겁의 시간 동안 집안 가득 구수하고 풋풋한 단내가 차오른다.
이 귀한 옥수수를 오래도록 맛있게 먹으려면 솥에 다 들어가지 않는 일부는 날것 그대로 냉동해서, 일부는 삶은 것을 냉동해 두면 된다. 먹을 때 다시 살짝 찌면 맛이 대부분 원상으로 복구된다. 그리하여 또 냉동실 가득 옥수수가 들어차 마음이 든든하다는 이야기.

 

칼끝을 대기만 해도 속까지 쩍 갈라지는
기분 좋은 파괴의 소리

그리고 대망의 수박이다. 감자나 옥수수는 냉장고 여기저기 덜어 넣을 수라도 있지, 수박 한 통은 대대적인 냉장고 리모델링을 해야 겨우 들어가지만 그래도 수박은 역시 통으로 사야 한다. 반 통짜리 수박이나 4분의 1쪽짜리 수박은 차라리 사지 마시라고 도시락 싸 들고 쫓아다니며 말리고 있는데, 이유는 맛이다. 최소 며칠은 먹는 것이 수박인데, 미리 잘라둔 것은 맛이 오래 가지 않는다. 한 통 다 못 먹는다는 변명, 1인 가구라는 변명 모두 필요 없이 수박은 무조건 통째로다.
올해 산 수박은 상품설명보다도 거대했다. 박씨 타는 흥부의 심경이 이랬을까. 케틀벨 중량을 업그레이드한 PT 회원님의 심정이 이런 것일까. 들어 옮기기에도 버거운 무게는 2L 생수 한 팩 무게보다 무거웠으니 필시 12kg 이상이었다. 나름 표준적인 크기의 도마가 좁게 느껴질 정도의 거대함은 두려움마저 불러일으켰다. 이것을 모두 먹어 치울 수 있을까, 그랜드캐니언이나 나이아가라 폭포 앞에 선 인간이 느낄 만한 경외심이었다.
칼끝을 대기만 해도 속까지 쩍 갈라지는 기분 좋은 파괴의 소리. 그리고 속에 가득 든 수분 탱탱한 새빨간 속살. 건강미를 과시하는 새카만 수박씨. 수박 한 통을 가를 때의 충만한 쾌감을 마트 직원에게 양보하는 것을 나는 이해할 수 없다. 냉장고에서 충분히 차게 식혀 갓 가른 수박을 허겁지겁 도마째로 와삭와삭 먹는 즐거움. 개수대에 퉤퉤 씨를 뱉을 때 몸의 말초까지 차오르는 달콤한 수분감. 그리고 입안에 느껴지는 까끌까끌한 수박 분의 맹렬한 당도. 여름의 가장 기쁜 순간 중 하나가 단맛이 끝까지 오른 차가운 수박을 갓 갈라 급히 맛볼 때다.
축제의 때는 도마 위에서까지만인 것 같다. 거대한 수박을 요리조리 잘라 용기에 테트리스 하듯 최대한 효율적으로 넣는 과정은 지난한 지적 육체노동이다. 봉투 하나를 채우고도 한참 더 쌓여 있는 단단한 껍질을 보는 것도 한숨 나는 일이다. 이 버겁게 압도적인 과일을 그래도 먹지 않고는 여름을 살았다고 할 수가 없다.
밥처럼 수박을 먹어도 남은 수박이 줄지 않아 까마득할 때가 있다. 그때 나는 수박을 아예 밥으로 만든다. 씨앗을 골라낸 수박 과육에 양파, 셀러리 그리고 오이 정도 있으면 된다. 마늘 한 톨과 토마토에 바질까지 있으면 금상첨화다. 블렌더로 이 모두를 윙윙 갈아 소금과 올리브오일을 충분히 넣고 반나절 정도 숙성해 두면 맛 좋은 수프가 된다. 스페인식 수프인 가스파초의 수박 버전이다. 냉장고에 한 통 갈아두고 먹을 때 통후추를 갈아서 뿌리고 올리브유를 한 번 더 두르면 이국적인 식사 메뉴로 손색없는 한 끼를 때마다 금세 마련할 수 있다. 냉동실에 오래 둔 바게트나 식빵, 사워도우빵 등을 오븐이나 에어프라이어에 바삭하게 구워 부숴 넣으면 여름 브런치로 속도 든든하다.
이쯤 하고 무사히 여름을 넘기는 줄 알았다. 여름 내내 부러 외면했지만 결국 ‘그레이트’ 황도 한 박스, 다품종소량생산 농부의 ‘에어룸’ 토마토 모둠 한 박스를 또 주문해 버리고야 말았다. 동네 과일가게에서 적당히 연명하며 버틴 복숭아는 마침 제철인 것이 보여서 우발적으로, 토마토는 진정 무르익은 때라며 아는 농부님이 몸소 연락하셔서, 사버렸다.
대책 없는 복숭아 한 박스와 토마토 한 박스가 냉장고에서 모두 사라질 때쯤이면 이미 여름도 가을바람에 다 식어 있을 테다. 가을엔 또 가을대로 가을의 거대함이 있겠지만, 여름을 충분히 즐기는 것이 여름의 일이다. 고됐던 8월을 ‘견뎠다’는 말 대신 “2021년에도 8월은 참 알차고 신나게 먹었다”는 말로 ‘델타 변이’, ‘4단계’, ‘확산세’, ‘폭염’이라는 말들을 희석해 기억하려 한다. 성큼 다가오는 가을엔 ‘선선한 바람’, ‘쾌청한 하늘’, ‘수확’, ‘추석’, ‘백신’이라는 산뜻한 말들만 우리에게 남아 있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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