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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의 영화상담실
분노는 분노로 해결되지 않는다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1년 09월호


〈쓰리 빌보드〉를 직역하면 ‘세 개의 광고판’이다. 작고 조용한 한 마을에서 딸이 강간살인을 당했다. 그런데 경찰들이 범인을 잡지 못하고 수사는 흐지부지 종결된다. 분노를 참을 수 없는 엄마 ‘밀드레드’는 경찰에, 더 나아가 세상을 향해 선전포고를 한다. 세 개의 광고판으로. 첫 번째 광고판에는 “내 딸이 죽으면서 강간을 당했다”, 두 번째에는 “아직도 범인을 못 잡은 거야?”, 그리고 마지막은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경찰서장?”이라는 도발적인 메시지를 쓴다.
마을에서 존경받는 경찰서장 ‘월러비’와 그를 광신적으로 따르는 경찰관 ‘딕슨’은 억울하고 화가 나 광고판을 내리게 하려 한다. 특히 인종차별주의자, 동성애 혐오자에 자신이 옳다는 근거 없는 확신을 갖고 살아가는 딕슨은 역시 자신이 옳다고 맹신하는 엄마 밀드레드와 첨예하게 대립한다. 마을의 평화를 원하는 주민들은 서서히 경찰관 편에 서고, 원래 거칠어 평판이 좋지 않던 밀드레드를 피한다. 암 투병을 하던 경찰서장은 신체적 고통을 더는 견디지 못하고 자살한다. 죽기 전 서장은 밀드레드에게 사과하는 유서를 쓰고 그녀가 광고판을 지킬 수 있도록 돈도 몰래 보낸다. 엄마는 분노하며 싸울 적을 갑자기 잃었다. 이제 마을 사람들은 엄마 때문에 서장이 자살했다며 비난한다. 엄마에게는 아직도 분노를 표출할 적이 필요하다. 엄마는 마을 전체와 싸우기 시작한다.
그러던 어느 밤 누군가 광고판에 불을 지른다. 엄마는 경찰 짓이라 믿고 경찰서에 화염병을 던진다. 그런데 불타는 경찰서 안에 있던 엄마의 원수 딕슨이 전신화상을 입으면서도 딸의 사건수사 기록을 밖으로 갖고 나온다. 이 상황을 지켜보던 엄마의 전 남편의 철없는 애인(딸과 같은 나이)은 책에서 읽은 적이 있다며 “분노는 분노로 해결되지 않는다. 분노는 더 큰 분노를 낳는다.”고 말한다. 웃으면서, 이 상황과 비슷하다면서.
이쯤에서 관객들은 누가 옳고 누가 잘못한 것인지 생각하게 된다. 처음에는 엄마가 옳고 경찰이 무능하다고 믿었지만, 이야기가 진행될수록 우유부단해 보이지만 선한 경찰서장이 옳다고 생각하게 된다. 피해자였던 엄마는 잔인한 분노표현 방식으로 결국 가해자가 된다. 무식하고 독선적인 딕슨은 모자라지만 자신의 한계 내에서 최선을 다하는 (비록 잘못된 방법들도 있었지만) 사람이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좀 더 들여다보면, 밀드레드는 ‘엄마’라는 역할을 잘하지 못했던 자신에게 분노하고 있다. 사건 당일 반항적인 딸이 밤에 외출하려는 것을 위험하다고 거칠게 막으니까 딸은 “난 강간당할 거야!”라고 외치며 뛰쳐나간다. 엄마는 그 뒤통수에 “제발 그러길 바란다!”고 쏘아붙였다. 인간은 스스로에 대한 분노를 오래 견디지 못한다. 자살하지 않으려면 그 분노를 밖으로 돌려야 한다.
정신의학에서는 이를 ‘투사’라고 한다. 투사는 자신이 느끼는 부정적인 감정이 다른 사람 때문에 일어난 것이라고 ‘눈 가리고 아웅’하며 믿는 것이다. 그러면 자신에게 향하던 분노를 타인에게 향하게 할 수 있고, 심지어는 내가 옳음과 선함을 위해 싸우는 ‘투사’가 되는 이득까지 얻을 수 있으니까. 밀드레드도 딸에 대한 미안함과 자책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었기에 그 분노를 복수심으로 변형시켰던 것이다. 딕슨이 자신이 느끼는 열등감에서 벗어나기 위해 약한 사람들을 위협했던 것처럼. 자기 방어를 위해.
내가 원수라고 믿는 상대방이 정말 나를 가해한 사람일까? 이 영화에서처럼 책임을 져야 할 살인범은 사라져 없고, 남아 있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주먹을 날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내게서 비롯된 고통과 분노를 타인의 탓으로 돌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서장은 죽기 전에 분노 속에서 살아가는 부하 딕슨에게 편지를 보낸다. “네가 증오를 계속 붙잡고 있는 한 더 힘들어질 수밖에 없어. 너는 듣기 싫어하겠지만, 우리에게 필요한 건 사랑이야. 진정한 사랑은 차분하고, 차분해져야 생각을 할 수 있어.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는 생각을 해야 해. 총과 분노는 아무 것도 해결하지 못해. 하지만 차분함은 무엇인가를 해결할 수 있게 해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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