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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의 씨앗
학교가 위대하다는 착각
오찬호 『하나도 괜찮지 않습니다』 저자 2021년 10월호
 

코로나바이러스로 학교가 꽤나 긍정적으로 주목받았다. 당연할 땐 몰랐는데, 학교가 멈추니 여간 불편한 일이 한두 개였던가. 아이들과 종일 함께하면 그 자체로 신경 쓸 것투성이다. 직장에서도 집중이 안 되고, 재택근무를 해도 주변이 산만하다. 전업주부를 비하하는 사람들은, 어차피 집에 있는데 그게 힘든 일이냐면서 빈정거리지만 애들 학교 가는 빈틈이 있기에 전업이 가능하다. 교육학 책들을 보면 학교의 순기능으로 ‘사회적 돌봄’이 언급되곤 했는데 팬데믹이 이를 증명했다. 결론은, 디지털 기술이 더 진보하더라도 대면할 수 있다면 학교로 학생들이 가는 게 ‘단지 그것만으로도’ 사회적 이득이 크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정도의 기능을 훌쩍 넘어서 학교가 언급된다. 등교 수업의 필요성이 언급될 때마다 교육청 아무개라는 사람이 방송에서 말한다. 학교는 인격을 성장시키고, 교사는 삶의 이정표가 되어주며, 친구들은 공동체의 가치를 일깨워주기에 전면 등교만이 답이라고. 그런가? 그랬던가? 학교가 언제 모두에게 동등한 크기의 희망을 제공했단 말인가? 지향해야 할 목표를 현재 상태라고 자부하는 뻔뻔함은 하나도 변하지 않았다. 교문 앞 커다란 돌에 새겨진 교훈이 얼마나 비현실적인지는 누구든지 안다. 예전 이야기라고? 폭력의 형태와 수위가 변했다는 것만으로 전인교육이 증명되진 않는다. 입시 결과로 학교가, 학급이, 학생들이 ‘좋고 나쁨’으로 선명하게 구분되는 곳에서 어찌 차별과 멸시가 순순히 사라지겠는가. 
학교 밖 청소년들이 예전에는 어떻게 불렸는가. 탈학교 청소년 정도는 온순한 표현이고 비행, 일탈 등 ‘문제아’라고 아예 못 박았다. 학교에 소속되지 않았다는 상황만으로 인생을 포기한 것으로 여겨졌고, 그래서 공동체에서 배제하는 게 당연했다. 그럴 수 있는, 그렇게 바라보는 강력한 축이 바로 학교였다. 그 안은 옳고, 선하고, 윤리적이라는 망상은 밖에 있는 사람을 부적응자로 보게끔 한다. 그리고 밖에 나가지 않는 이상 알아서 적응하라고만 강요한다. 
얼마나 여전하냐면, 학교폭력 예방 행동요령이랍시고 ‘2021년도에’ 언급되는 게 이렇다. 첫째, 친구들과 함께 큰길로 등하교하기. 둘째, 위험을 느낄 때는 등하교 방법을 바꾸거나 부모님과 동행하기. 셋째, 단체 활동으로 친구 사귀기. 요약하자면 폭력 정도는 스스로 피하라는 거다. 몇 년 전에 한 교육청에서 ‘자신의 외모를 놀리는 별명을 그냥 받아들이세요!’ 따위의 말을 조언이랍시고 떠들어서 기가 찬 적이 있었는데 별반 다르지 않다. 
‘학교생활 잘하면 아무 문제없다’는 차별의 씨앗을 뿌리는 이유는 피해자조차 어딘가 학교와 어울리지 않는 구석이 있다는 편견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폭력‘을’ 예방할 생각을 못하니, 폭력‘에’ 노출될 것이 걱정인 사람에게 이러쿵저러쿵 간섭하기 바쁘다. 특히 단체 활동을 ‘이런 이유로’ 하라니 황당하다. 아무 문제없는 개인의 성향을 고의적으로 바꾸라는 것이 어찌 대안인가. 이 사회가 가지고 있는 외향성과 내향성에 대한 단순 구분 그 이상의 의미, 이를테면 외향적이면 사람들과의 관계도 문제없고 내향적이면 소심해서 좀 그렇고 그렇다는 인식을 학교에서부터 심어주고 있으니 이거야말로 폭력이다. 혼자 있기 좋아하는 사람을 ‘함께’ 섞이도록 하는 게 중요한 게 아니라, 혼자 그 자체가 인정받을 수 있기에 학교가 의미가 있는 것이겠지만, 한국에선 먼 나라 이야기다.
학교에 사랑이 넘치면 좋을 일이다. 하지만 그럴 거라고 믿는 순간, 그러지 못하는 지점들이 잘 보이지 않는다. 코로나19 덕택에 그 지긋지긋한 인간들 얼굴 안 보게 돼서 다행이라고 여기는 사람이 얼마나 많은데, ‘학교는 사랑이기에’ 대면해야 한다니 참으로 뻔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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