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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갓 지은 흰 쌀밥은 못 참지!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21년 10월호

 

내 어린 시절은 대가족과 핵가족 세대가 반반 섞인 시대였다. 모두가 저녁엔 집에 돌아와 밥을 먹었고, 집집마다 부엌살림을 도맡는 구성원 하나씩 꼭 있었다. 흙먼지 뒤집어쓰며 꾀죄죄하게 옷을 버려가며 놀다 보면, 해가 넘어갈 무렵 온 동네에 저녁밥 짓는 냄새가 가득해지는 마법의 순간이 있었다. 골목을 잰걸음으로 지나는 사이엔 ‘통장 아줌마 집은 김치찌개가, 영주네 집은 고등어조림이, 화분 할머니네 집은 제육볶음이 상에 오르겠구나’ 하고 킁킁대며 우리 집 밥상의 주인공을 궁금해하곤 했다. 
우리 집 밥상의 주인공이 항상 맘에 들지는 않았다. 시시한 콩나물국과 김치볶음에 짠 저장 반찬이나 김치며 나물만 잔뜩 올라오기도 하기 마련인 것이 누군가가 차려주는 밥상의 섭리이니까. 하지만 언제나 그것이 있어서 입맛을 다실 수 있었다. 갓 지은 흰 쌀밥. 요즘 말로, 그건 못 참는다.
밥은 다른 찬과 국을 차리고 끓이는 사이에 뜸을 들여놔 상 차리기 직전에 뚜껑을 열었다. 그러면 뚜껑 틈으로 비집고 나오던 밥 향기가 그야말로 폭발하는 것이다. 물 묻힌 주걱으로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쌀밥을 밥공기에 소복하게 담아내는 것이 상차림의 마지막 순서였다. 고슬고슬하게 윤기가 쫙 도는 쌀밥은 숟가락 가득 퍼서 입안에 넣기만 해도 뜨거운 달달함이 입안에서 녹아내렸다. 볼멘소리하며 반찬은 진미채 하나만 씹어도 밥맛으로 결국 밥을 먹는다. 

밥맛에 대해 깐깐하게 군다는 것
그때만 해도 밥에 대해 참으로 순수했다. 누구나 그랬고, 나 역시 그러했다. 어느 집이고 시골에서 한 가마니 올라와 뒤주에 넣어 놓고 한 해 내내 야금야금 빼먹는 것이 쌀이었다. 밥은 끼니마다 짓는 것이고, 쌀이면 그 자체로 귀한 대접을 받았으니 산지나 품종을 따지는 일은 불필요를 넘어 불경한 것이기까지 했다. 밥투정이라니! 
이제는 내가 순수하지 못해, 밥투정을 너무나 뻔뻔하게 하는 사람이 돼버렸다. 밥맛이 쌀 품종에 따라, 쌀 컨디션에 따라 너무 다르다. 갓 지은 흰 쌀밥이라고 해서 무조건 맛있지가 않은 몸이 됐다. 
우선 개인적인 식습관 변화가 있다. 밥이 낯선 식습관이다. 일부러는 아니지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자연스럽게 저탄고지(저탄수화물 고지방의 줄임말) 식생활을 하게 됐다. 과거 한국인의 상차림은 밥을 주된 칼로리 충당원으로 해 약간의 반찬과 국을 곁들이는 식이었는데, 그런 식생활이 맞지 않고 차라리 한 그릇 음식을 그때그때 차려 먹는 것이 효율적이고 편한 가구가 더 많아졌다. 냉장고에 여러 가지 저장 반찬을 잔뜩 채워 두거나 1~2인분만 끓이기 곤란한 국이나 찌개, 1~2인분만 만들기가 더 어려운 고기반찬 등 메인 요리를 만드는 일이 점점 희소해졌다. 그러다 보니 밥과 거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이다. 내 경우에도 고기와 채소를 간단하게 소금간만으로 볶아 먹는 것이 세상에서 가장 효율적이고 만족스러우며, 노동력 차원에서도 편한 식사 준비다 보니 밥상에 정작 밥이 낄 자리가 좁아져 버렸다. 
직업상 밥을 순수하게 바라보지 못하는 관점의 변화는 식습관 변화보다도 더 크다. 쌀의 품종을 따지는 오랜 직업 습관 때문이다. 품종마다 몇백 그램 단위로 쌀을 사다 놓고 마치 심사위원이나 된 듯 각 품종의 성질과 맛을 주의 깊게 음미하는 것이 내 밥의 일상이 됐다. 사실 품종마다 맛보는 일이 아니고선 순수하게 밥을 짓는 일조차 거의 없다. 직업으로 인해 식생활이 오염된 셈이다. 그때처럼 그저 갓 지어 김이 난다는 이유만으로 볼이 불룩해질 정도로 밥을 욱여넣지 못하게 됐다. 쌀알이 큰 품종, 쌀알이 작은 품종, 고슬고슬한 성질의 쌀 품종, 부드럽고 무른 성질의 쌀 품종 꼬치꼬치 따져가며 젓가락으로 깨작깨작 먹는 멍에 같은 습관···.
그래도 보람이 있다. 밥이 홀대받는 시대, 쌀이야말로 품종마다 밥맛이 다름을 알고 먹으면 더 맛있다. 어떤 쌀은 그 압도적인 ‘갓 지은 흰 쌀밥’ 판타지를 극대화하는 윤기를 갖고 있고, 또 어떤 쌀은 흰밥으로 먹는 것보다 볶음밥으로 먹거나 국물에 토렴해 먹었을 때 맛있다는 등, 밥을 먹는 일도 좀 더 세심하게 관심을 두면 참 재미있는 경험이 된다. 우리 시대 사람들이 전보다 밥을 적게 먹는 만큼 더욱더 맛있는 밥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이 나의 직업적 주장이다. 그래야 소비자도 만족하고 생산자도 만족하는 균형이 맞춰진다.

올해는 대량생산 혼합미 대신 새로운 쌀 품종에 도전해 보길
나는 해마다 추석 무렵부터 햅쌀을 사들이기 시작한다. 한 해의 소출을 누리는 추석 명절을 기점으로 햅쌀 시즌이 시작된다. 우선 추석에 나오는 조생종 쌀 중 몇 해 사이 나온 새로운 품종으로는 단연 ‘해들’을 추천한다. 윤기와 찰기가 고루 좋으면서 탄력 있게 씹히는 고슬고슬한 밥맛의 쌀이다. 배부른 명절의 환희와 어울리는 햅쌀로, 명절 음식과도 좋은 조화를 이룬다. 추석 명절의 살찐 여운이 지날 때쯤부터가 본격적인 햅쌀 마련의 시기인데, 이때 사는 쌀이 저장해 두고 먹어도 되는 중만생종 쌀이다. 또 한 해 흡족한 저녁 식탁 풍경을 그린다면 평소 구매하는 ‘XXX표 XX쌀’ 대신 새로운 쌀 품종에도 소량씩 도전해 보길 강력하게 권한다. 전자는 20세기 산지, 브랜드 단위의 대량생산 혼합미이고, 후자는 쌀 품종을 블렌딩하지 않아 하나의 품종씩 특징적으로 맛볼 수 있는 싱글 오리진 커피 같은 개념이다. 매년 새로운 쌀을 맛보니 추천도 달라지는데, 올해는 쌀 연구에 언제나 열심인 농촌진흥청이 새로이 공인한 쌀 품종들을 추천한다. 농촌진흥청이 전개 중인 ‘최고품질 벼 생산·공급 거점 단지’는 맛있는 쌀 품종이 가장 맛있게 자라는 곳을 연구해 품종별 쌀 생산 거점으로 육성하는 사업이다. 경기 고양의 가와지1호, 강원 원주의 삼광·운광·대안·고향찰벼, 충북 괴산의 진상2호, 충남 서산의 백옥향, 전북 익산의 미호·십리향, 전남 영광의 새청무·진상2호, 전남 함평의 호평·조명, 경북 상주의 일품·미소진미, 경남 거창의 삼광 쌀이 선정돼 있다. 우수한 밥맛을 내는 품종을 쌀이 잘 자라는 지역마다 특화해 제시하니 그간의 누적 연구가 집대성된 실용 ‘꿀팁’이다. 소비자에겐 다소 낯선 품종, 생소한 산지일 수 있지만 일단 믿어보시라. 
아주 옛날 이야기로 글을 시작했지만 지금 내가 사는 동네에서도 옛날 그 저녁밥 냄새를 이따금 맡을 수 있다. 노인 세대와 대가족 세대, 1~2인 세대가 혼재된 옛날 동네라서다. 허름한 다가구주택과 커다란 단독주택과 새로 지은 원룸 건물이 섞여 있는 저녁 골목에 드문드문 불고기며 청국장, 뭇국 향기가 새어나오곤 한다. 물론 오토바이 배달원이 치킨이며 곱창볶음을 실어 나르는 것을 더 많이 보지만 말이다. 
어떠한 형태의 저녁 밥상이든, 모두의 밥상에 맛있는 밥이 함께하길 바란다. 순순하지 못한 나는 퇴근길마다 비밀스레 궁리하곤 한다. 이 집 불고기는 간장 향과 기름 향이 밀키퀸2호 같은 향미 계열과 잘 어울릴 텐데, 앞집은 뭇국에 밥 말아 먹을 거면 신동진이 밥알이 통통하게 잘 살아 있을 텐데. 아아, 아랫집 간장 치킨 저거 혹시 반찬으로 시킨 거면 꼭 일품 쌀이랑 먹어보면 좋을 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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