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번뿐인 인생 그리고 어차피 빈손으로 돌아가는 삶, 소유하기보다는 경험을 쌓겠다며 경험에 투자하는 사람이 늘고 있다. 소유할 수 있는 가치보다 경험할 수 있는 가치가 더 크다고 느끼는 까닭이다. 경험을 사고(buy) 사는(live) ‘경험경제’ 시대, 경험은 성능과 효용을 넘어 ‘마음의 만족도’가 가장 큰 투자 종목이었다.
소유에서 경험으로, 스트리밍 라이프
‘띠리링.’ A씨의 휴대폰 알람이 울린다. 그림 구독 업체에서 온 알람이다. 이내 집 거실에 걸려 있는 그림 대여 기한이 다 돼가니 교체 시기에 맞춰 새 작품을 골라달라는 안내 문자가 뜬다. 쌍둥이 아이들을 위해 4년째 그림 구독서비스를 이용해 온 그녀는 아이들을 데리고 미술관에 가는 대신, 작가의 미술품을 집에서 느긋하게 감상하는 쪽을 택했다. 작품 사이즈에 따라 3만~7만 원 정도의 구독료를 지불하지만, 3개월에 한 번씩 작품을 교체해 다양한 그림을 ‘경험’함으로써 생활의 활력소를 얻고 있다.
벽장을 가득 메운 LP판과 CD, 서재에 꽂힌 책과 수집품이 취향의 척도이던 시절이 있었다면, 요즘은 스마트폰만 있으면 언제 어디서든 음원 사이트나 온라인 라이브러리에 접속해 원하는 음악이나 도서를 접할 수 있다. ‘한 번뿐인 내 인생!’을 외치며 경험에 투자하던 욜로(YOLO)족이 있었다면, 지금은 해외여행이나 취미 같은 경험을 ‘취사선택’하는 걸 넘어 다양한 경험으로 삶을 채우는 사람들이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다. 이른바 경험의 ‘스트리밍(streaming)’이 가능해졌다.
매년 라이프스타일의 변화를 예측해 제시하는 전미영 서울대 소비트렌드분석센터 연구위원은 “스트리밍이란 ‘흐른다’는 뜻으로, 인터넷에서 음악, 드라마, 소설, 영화 등의 콘텐츠를 다운로드하지 않고 실시간으로 재생하는 콘텐츠 전송 방식을 뜻한다”며 “최근 소비자들이 경험을 접하는 방식은 그 같은 스트리밍 방식을 닮았다”고 말한다.
스트리밍의 가장 큰 차별성은 뭘까. 바로 ‘경험 가치’가 ‘소유 가치’를 압도한다는 데 있다. 스트리밍하듯 옮겨 다니며 흐름을 타다 보면 보다 풍부한 일상의 채집이 가능해진다. 사는(buy) 것이 달라지면 사는(live) 것도 달라진다는 우스갯소리가 통용되는 건 그 때문이다.
소비자가 돈을 지급하고 특정 상품의 소유권을 갖는 ‘상품경제’도 사용한 만큼 비용을 지불하고 일정 기간 점유권을 갖는 ‘공유경제’를 거쳐 ‘구독경제’로 빠르게 전환되고 있다. 신문 구독에서 모티브를 따 ‘구독경제’라는 용어를 처음 만든 미국의 기업가 티엔 추오는 정보기술사회에서는 소비자들이 제품보다는 서비스, 소유보다는 경험과 가치를 더 중시한다고 말한다. 물건이 넘쳐나고 트렌드 전환주기가 빠른 사회에서 구독경제는 ‘경제적 이익’ 그리고 ‘새로운 경험’을 의미한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집을 중심으로 돌아가기 시작한 생활패턴의 변화도 구독경제로의 빠른 전환에 한몫했다. 집에서 일하며 지내는 시간이 길어지다 보니 자연스럽게 집에서 할 수 있는 활동에 집중하게 된 것이다. 최근의 구독서비스들은 생활의 편리를 넘어 새로운 경험을 선사하기 위해 진화하고 있다.
집에서 구독할 서비스를 알아보던 B씨는 ‘구독 신세계’에 매료돼 커피 구독을 신청했다. 여기에 재미를 붙인 그는 집에서 즐길 수 있는 다른 구독서비스들을 계속 추가했다. 직장 회식이 급격히 줄면서 확보된 저녁 시간에 넷플릭스로 드라마를 보며 맥주 한잔을 즐기기 위해 맥주 구독서비스도 신청했다. 구독 신청자가 많아 맥주 서버를 받기까지 2주나 기다렸지만, 맥주 전문점에서나 만날 수 있는 풍미를 느끼는 시간은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소중한 경험이었다.
‘내돈 내산!’ 경험 위시리스트를 만드는 사람들
제품만이 상품 가치를 지녔던 과거와 달리, 지금은 경험도 하나의 상품으로서 가치를 지니게 됐다. 물건이 아닌, 자신만이 경험할 수 있는 특별한 시간에서 더 큰 만족감을 얻는 사람이 늘어나면서 이른바 ‘경험경제’도 커지고 있다. 『경험 경제』라는 책을 공동 출간하기도 한 미국의 경제학자 조셉 파인과 제임스 길모어는 재화를 주로 거래했던 산업경제, 무형의 서비스를 거래하는 서비스경제에 이어 경험경제가 새로운 경제 패러다임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미국의 한 여론조사기관의 조사 결과에 따르면, 밀레니얼 세대의 78%가 갖고 싶은 물건보다 하고 싶은 경험에 돈을 지출하는 것을 선택했다고 한다. 기업 또한 ‘경험 마케팅’을 확대하며 사회적 변화에 대응하고 있다. SNS에는 쿠킹 클래스나 플로리스트 1일 과정 등 원데이 클래스는 물론이고 라이딩, 캠핑, 낚시 등 새로운 체험이나 취미 활동을 인증하는 사진들로 가득하다. 여행지에서의 한 달 살기나 휴양지 호텔에서의 ‘스테이케이션(stay+vacation)’ 인기도 식지 않고 있다. ‘나만의 책 만들기’, ‘완주 한옥에서 BTS처럼 사진 찍기’, ‘100일 촌라이프’ 같은 체험들은 아예 입소문을 타고 누군가의 경험이 또 다른 사람의 경험을 낳는 경험의 확대 재생산 사례를 만들고 있다.
서울의 홍보대행사에서 근무하는 C씨는 지난여름 강원도 양양에서 1주일은 일하고 1주일은 여행하는 2주간의 ‘워케이션(work+vacation)’을 즐겼다. 2주 동안 여행지에서 머무는 비용으로 하이엔드 브랜드의 옷이나 가방을 구입할 수도 있었지만, 그녀의 선택은 단호했다. “예쁜 옷을 입었을 때의 기분과 때 묻지 않은 자연의 품 안에서 느낀 색다른 행복 중 어느 것이 더 오래 기억에 남을까요? 내 인생을 더욱 풍족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후자라고 생각해요. 다시 선택한다 해도 워케이션에 투자할 거예요.” 그녀뿐만이 아니다. 앞으로도 사람들은 새로운 경험을 위해 지갑을 여는 순간이 늘 것이다. 값비싼 명품보다 값진 경험을 소비하는 라이프스타일이 더 멋있는 삶으로 여겨지는 지금은 누가 뭐래도 ‘경험경제’ 시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