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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김창기의 영화상담실현실은 이상을 동경하고, 이상은 현실을 말한다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1년 10월호
 
가을에 어울릴 만한 영화를 생각하다 트렌치코트를 입고 비를 맞으며 낙엽이 흩날리는 오래된 골목을 걷는 낭만이 떠올랐다. 영화 <미드나잇 인 파리>의 장면이.
시나리오 작가 길은 아름다운 약혼녀 이네즈와 파리로 여행을 간다. 길은 파리의 예술과 낭만을 느끼고 싶은데, 약혼녀는 그런 것에는 전혀 관심이 없고 이해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상업적인 시나리오 쓰기를 그만 두고 오래 전부터 꿈꿔 오던 예술적인 소설을 쓰겠다는 길에게 오히려 화를 낸다. 그런 약혼녀의 모습에 실망한 길은 과연 자신이 사랑이라 믿었던 것이 진짜일까 하는 생각에 빠져든다.
이런저런 고민을 하며 혼자 파리의 밤거리를 산책하는데 자정 종이 울린다. 그때 오래된 차 한 대가 길에게 다가오더니 빨리 올라타라고 한다. 차가 내려준 곳은 1920년대의 파리, 그중에서도 당대의 유명한 예술가들이 모이던 술집 앞이다. 1920년대가 예술의 황금기였다고 믿는 길은 얼떨결에 그가 동경하던 예술과 자유와 낭만이 꿈틀거리던 그 시절의 파리로 시간여행을 하게 된 것이다.
이런 황당한 시간여행은 어쩌면 길이 파리에서 잠을 자다 꾼 꿈일 수도 있다. 길이 항상 꿈꿔 오던 예술적 이상이라는 의미에서 예술적 이상향의 꿈일 수도 있다. 어쨌든 길은 매일 밤 자정부터 새벽까지 1920년대 예술의 전설인 헤밍웨이, 피츠제럴드, 피카소, 달리 등을 만나며 꿈같은 시간을 보낸다. 헤밍웨이와 피카소의 연인이었던 아드리아나를 만나 사랑에 빠지기도 한다.
전설들과 친구가 된 길은 ‘인간은 현실이 아닌 비현실, 주로 과거를 동경한다’는 것을 발견한다. 길을 비롯한 현대의 예술가 대부분은 현대의 예술에 실망하고 1920년대의 실험적이고 깊이 있던 예술을 그리워한다. 그런데 예술의 황금기였다던 1920년대 파리에 모여들던 당시의 예술가들은 그 이전의 벨 에포크 시절을 그리워하고, 벨 에포크 시절의 예술가들은 르네상스 시절을 그리워한다. 그 와중에 이런 대사가 나온다. “현재는 결국 늘 조금 불만족스러운 거야. 인생이 늘 조금 불만족스럽기에.” 그래서 현실이 아닌 비현실, 불투명한 미래보다는 그래도 조금 아는 과거를 이상화시키곤 하는 것이다.
과거는 돌아갈 수 없기에 그립고, 미화되기에 아름다워진다. 인간의 기억은 왜곡돼 저장된다. 더 우세한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덜 중요한 정보는 변경될 수 있다. 또 기억은 회상될 때 여러 번 더 변형된다. 이야기가 논리와 형식, 고정관념의 틀에 맞춰져야 하기 때문이다. 거기에 신경증적인 동기적 망각과 왜곡도 끼어든다. 따라서 과거는 사실 그렇게 아름답지 않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걱정 없이 즐거웠던 유년 시절, 군대스리가, 뜨거웠던 사랑이 사실은 많은 부분 왜곡된 기억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쓰기 시작한 소설에 귀를 기울이는 아드리아나라는 아름다운 여인이 자신을 사랑해 주고, 평소 동경했던 예술과 철학이 현재인 1920년대에서 길은 행복하다. 그렇지만 현재로 돌아가기로 결정한다. 자신이 만들지 않은 만족스러운 과거에 안주하지 않고, 자신만의 진정한 삶을 현재에서 만들기로 한 것이다. 길은 ‘자신이 원하는 자신’이 되기 위해 약혼녀와 헤어지고 혼자 파리에 남아 소설을 쓰기 시작한다.
과거가 있어야 현재가 있고, 현재가 있어야 미래가 있다. 성서나 교과서에서 하는 이야기는 대충 “현재에 최선을 다해야 더 좋은 미래가 열린다. 돌아갈 수 없는 과거에 집착하지는 말되, 잘 기억하고 과거로부터 배워서 더 좋은 미래를 만들어라.”로 요약될 수 있다. 하지만 정신건강의학과 의사인 나는 비가 내리고 낙엽이 흩날릴 때면 옷깃을 추켜세우고 잠시 머릿속으로, 아름답던 과거로 시간여행하는 것을 적극 권한다. 왜곡되고 미화됐다 하더라도, 힘겨운 현실에 지친 우리의 영혼에 가장 효험 있는 치료제는 추억이기에. 그리고 삶이 고달프고 퍽퍽한 것임을 알고 우리를 지켜주기 위해 뇌가 고맙게도 왜곡시켜준 결과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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