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 타는 냄새같이 좋은 것이 있을까? 갓 볶아낸 커피의 냄새가 난다. 잘 익은 개암 냄새가 난다. (중략) 낙엽의 산더미를 바라보며, 향기로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별안간 삶의 의욕을 느끼게 된다.”
낙엽을 소재로 가을을 묘사한 이효석의 수필 ‘낙엽을 태우면서’의 한 대목이다. 어느덧 가을 한가운데 서 있다. 가을을 오감으로 누리고 싶은 마음에 대전의 한 숲을 찾았다.
가을의 정취를 느낄 수 있는 곳으로
대전광역시는 영호남과 충청이 만나는 접점으로 예부터 전략적 요충지였다. 조선시대에는 한양에서 출발해 목포에 닿는 삼남대로가, 일제강점기를 거쳐 현대에 와서는 1번 국도와 경부고속도로가 지나는 길에 대전이 있다. 대전은 언택트 여행이 당연시되는 요즘 당일치기 여행지로 안성맞춤이다. 사통팔달 교통이 편리한 데다, 도심과 가까운 곳에 비대면으로 여행을 즐길 곳이 많아서다. 그 가운데 대덕구는 경부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가 만나는 회덕인터체인지와 가깝고 경부선·호남선 철도가 통과하는 교통의 노른자위다.
가을이 절정에 다다른 10월, 숲은 온통 울긋불긋 색채의 마술에 걸린 듯 화려하다. 이 무렵 숲을 여행한다는 건 행운이다. 게다가 만추를 향해 바람 흐르듯 흘러가는 가을 숲의 정취를 오감으로 느낄 수 있다면 금상첨화라 하겠다.
대전 계족산은 오감으로 숲과 교감하기 좋다. 무려 14.5km에 이르는 황톳길이 기다리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탁 트인 전망의 계족산성을 밟으며 대전 시내를 발아래 둘 수 있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 호연지기가 꿈틀대지 않을까.
대전에는 ‘계’자를 쓰는 산이 두 곳이다. 계룡산(846.5m)과 오늘 찾을 계족산(429m)이 그곳이다. 우연일까. 두 산 모두 ‘계(鷄)’자를 쓴다. 우리나라에서 두 번째로 국립공원으로 지정된 계룡산은 산의 능선이 닭의 볏을 쓴 용의 모습과 닮아 계룡(鷄龍)으로 불리게 됐다고 하고, 계족산은 산의 형세가 닭의 다리를 닮아서 계족(鷄足)이라 부른다고 한다. 계족산 인근 마을에 지네가 많아 지네와 천적인 닭을 이름에 붙였다는 설도 있다.
계족산 황톳길은 주차장을 지나 임도를 3분 정도 걸어가면 바로 만날 수 있다. 입구엔 장동산림욕장을 알리는 팻말이 커다랗게 붙어 있다. 1995년 개장한 장동산림욕장은 계족산 황톳길이 힐링 명소로 주목받기 전부터 대전 시민의 휴식공간으로 이용됐다. 따지고 보면 황톳길의 명성 뒤에는 이미 잘 가꿔놓은 장동산림욕장의 체육시설, 등산 순환로, 휴식공간이 한몫한 것이다.
소문처럼 황톳길엔 붉은 황토가 깔려 있다. 계절이 계절인 만큼 황토 위엔 낙엽이 내려앉았다. 가을 특유의 색감이 황톳길을 더욱 운치 있게 꾸며놨다. 이미 신발을 벗고 황톳길을 걷는 사람들이 있다. 한 손에는 신발을 들고, 또 다른 한 손에는 다른 사람의 손을 잡고 서로 의지한 채 자박자박 걷는다. 그 모습이 인상적이다. 대부분 격 없는 모습으로 보아 가족이 분명해 보인다. 사회적 거리두기가 일상이 된 요즘, 손을 잡고 걸었던 게 언제인가 싶을 정도로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당연한 게 당연하지 않은 요즘, 손을 맞잡는 것만으로도 고맙고 감동적이다. 비록 그것이 작은 것이라 하더라도.
황톳길은 계족산성을 둘러싼 산책로 대부분에 깔려 있다. 맨발로 걷는 사람을 위해 산책로 중간중간에 세족장이 있으니 발 닦을 염려는 내려놔도 좋겠다. 흔히 발을 가리켜 오장육부의 축소판이라고 한다. 그만큼 맨발 걷기는 각각의 혈 자리를 자극해 혈액순환과 신진대사를 원활하게 하는 것은 물론이고 피로 해소에도 효과가 있다. 실제로 30분 정도 맨발 걷기를 하고 나면 더부룩했던 속이 시원해지거나 눈과 머리가 맑아지는 효과를 볼 수 있다.
오감을 자극하는 황톳길의 매력
앞선 사람들처럼 신발을 벗고 맨발로 황톳길을 걸어본다. 황토를 밟는 촉감이 상상했던 것보다 부드럽고 촉촉하다. 바닷가에서 모래를 한 줌 쥐면 순식간에 빠져나가는 것처럼 황토 역시 발가락 사이로 밀려 나간다. 황토의 미끄덩거리는 촉감을 느껴본 사람이 몇이나 될까. 알고 보니 하루에 2번 정도 차량을 이용해 황토에 수분을 공급한다고 한다. 정성이 대단하다. 발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발걸음을 옮기다 보니 신발을 신고 걸을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걸음이 느리다. 놀랍게도 느린 발걸음이 즐겁고 행복하다. 빠르게만 살아온 지난날을 보상이라도 하듯.
걸음이 느려지니 오감이 예민해진다. 가장 예민한 건 당연히 촉감일 테고, 시각도 덩달아 예민하다. 빨리 걸을 때 보지 못했던 계절의 변화를 눈치채기 시작한 것이다. 10월은 가을이라고 생각했는데 숲은 이미 겨울을 준비하고 있다. 나무는 월동을 위해 잎을 떨굴 채비를 하고 뿌리에서 먼 가지엔 수분을 차단해 하루가 다르게 야위어간다. 청각도 예민하다. 이름 모를 산새의 노랫소리는 물론이고 바람에 이는 낙엽 소리까지 귀 기울일 수 있다. 후각은 또 어떤가. 나뭇잎이 바삭바삭할 정도로 건조한 날씨 탓에 숲에서는 너무 오래 볶아 타버린 커피 향처럼 진한 향을 맡을 수 있다. 미각도 놓칠 수 없다. 숲에서 맛보는 공기는 남다르다. 특히 도시 생활자라면 자신이 사는 도시의 공기 맛과 이곳의 맛을 구분할 수 있을 것이다. 숲은 오감을 자극하고 오감은 숲의 과하지 않은 자연스러운 자극에 이끌려 한없는 휴식을 즐긴다.
달팽이가 걷듯 느릿한 걸음 끝에 드디어 계족산성을 알리는 표지판에 이른다. 이후부터는 길이 제법 가파르다. 계단도 오르고 비탈도 오르내린다. 길 폭도 이전보다 훨씬 좁아서 혼자 걷기 좋을 정도다. 이런 길을 약 700m 오르자, 드디어 하늘이 탁 트이더니 성벽이 눈앞에 모습을 드러낸다.
계족산성은 산 정상에서부터 동북쪽으로 약 1.3km 떨어진 지점까지 이어지는데 능선을 따라 쌓은 테뫼식 석축산성이다. 발굴 초기에는 백제가 쌓은 것으로 알려졌으나, 1998년에 성안에서 신라 토기 조각이 다수 발굴되면서 6세기 무렵 신라가 쌓은 것으로 밝혀졌다. 성벽에 가까이 갈수록 성곽의 위엄이 대단하다. 성벽의 높이는 자그마치 7~10m, 가쁜 숨을 몰아쉬고 성곽에 올라 아래를 내려다보니 아찔하다. 시선을 먼 곳으로 향하자 대전 지역이 한눈에 들어온다. 발품을 판 보람이 있다.
계족산성은 탁 트인 전망이 으뜸인 만큼 대전 시민들에게 해맞이 명소로 알려져 있다. 대전에서 맞이하는 새해 첫 태양은 어떤 빛깔일까. 당연히 여느 곳과 다르지 않겠지만, 사통팔달한 대전이 주는 남다른 의미만큼 새해 소망도 이전과 달리 다양하지 않을까. 2022년 새해는 대전에서 맞아야 할 것 같다. 이 일을 어쩌나 벌써 계족산의 겨울 풍경이 기다려진다. 가을 한가운데 서 있는데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