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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어로만 존재하는 고통에 대하여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1년 11월호


최근 1, 2년 사이 정신질환과 관련한 책이 쏟아지듯 나오고 있다. 이전까지는 『한낮의 우울』을 쓴 앤드류 솔로몬 같은 임상심리학자나 정신의학자가 집필한 전문성을 띤 책이 주를 이뤘다면, 요즘은 정신질환을 겪어온 당사자들이 자신의 개인적이고 내밀한 경험을 담은 수기들이 대세를 이룬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불안장애, ADHD, 조울증, 조현병, 거식증 같은 식이장애 등 종류도 다양해서,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사람 중에 평소 궁금했던 정신질환이 있다면 일단 책을 찾아보라고, 웬만한 질병은 책으로 나와 있을 거라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런 책들 사이에서 『정신병의 나라에서 왔습니다』는 조금 독특한 위치에 있다. 작가 리단은 정신질환을 오래도록 겪어온 당사자로서 정신병의 가장 깊숙하고 구석진 곳까지 겪어보고 들여다본 사람만이 쓸 수 있는 생생하고 단단한 경험을 들려준다. 이에 그치지 않고, SNS를 통해 ‘여성 정병러 자조모임’을 조직해 수많은 환자를 만나고 수년간 정신질환에 관해 쓰고 그려온 것을 토대로 그 어떤 전문가도 가닿을 수 없는 정신병 환자들의 실질적인 고통과 현실을 학자의 눈으로 분석하고 담아낸다. 여성학 연구자 정희진이 “내가 이제까지 읽은 정신질환에 관한 책 중 가장 적확한 보고이자 실제적인 지침을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한 말에 백번 공감한다. 이 책은 내가 그동안 읽은 정신질환에 관한 책 중에서도 단연 독보적이다. 

언어라는 매미채로는 결코 병을 잡아낼 수 없다는 것을 느낀다. 결국 언어, 바로 모국어가 자신을 버린 느낌이야말로 정신질환을 통해 경험할 수 있는 최악의 순간 중 하나다. 이미 죽고 싶어 하는 이들이 너무 많아서 단순한 ‘죽고 싶다’ 쯤은 죽음의 레이스에 명함도 내밀지 못한다. (…) 당신의 ‘죽고 싶다’는 이미 널리 통용되는 ‘죽고 싶다’ 아래에서 흐드러진다. 본인이 느끼는 바로 그 특별하고 특유한, 자신을 절망케하는 유일한 ‘죽고 싶다’를 아는 사람은 없다. -p.292~293

꼭 정신질환이 아니어도 ‘나만의 지옥’을 경험해 본 사람이라면 모국어로부터 버림받은 느낌이 무엇인지 알 것이다. 평소 사용하던 단어들로는 이 고통을 온전히 담아낼 수 없는, 내가 겪는 것들이 모든 언어의 의미값을 훌쩍 넘어서버려 타인에게 전달할 수 있는 형태의 말로 도저히 만들 수 없는. 정신질환자들이 갖는 절망은 그런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같은 환자들과의 관계 속으로 숨어들어 가고, 그렇게 점점 고립된다. 분석적이면서도 시적이고 감각적이면서도 명징한 리단의 글을 통해 그런 절망들을 감각하고 나니 갑자기 잠수를 타고 사라졌다가 새로운 친구들과 함께 나타났다가 다시 사라졌던 언젠가의 그들과, “사랑하는 친구가 죽었다”는 식의 이야기를 지어내며 고통을 호소하곤 했던 어느 동기가 생각났다. 그것은 정신질환으로 일상생활이 불가능해진, 그 불능의 상태를 설득할 말을 도저히 찾을 수 없어 빗댈 만한 상황이라도 만들어내야 했던 절박함 때문이었을지도 모른다는 데에 처음으로 생각이 미쳤다. 동시에, “모든 고통은 번역어로 존재”하는 한계 속에서 리단의 글은 존재할 수 있는 최고의 번역어를 환자들에게도 쥐여 준 듯하다. 조증이나 조현병의 상태를 잘 설명하지 못했던 이들이 리단의 글을 진심으로 반기며 자신을 조금씩 설명하는 걸 보면 말이다. 그래서 당사자들은 물론 그렇지 않은 이들도 이 책을 꼭 읽어보면 좋겠다. 우리는 언제든 취약한 언어 속에서 고통을 나누고 이해할 말을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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