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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오늘도 미식솥밥으로 난 한 해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21년 12월호




다른 솥밥은 뚜껑을 열면 밥내가 나는데, 인삼솥밥은 인삼내가 났다. 더덕이 그렇고 도라지가 그렇듯 식욕을 자극하는 쌉쌀한 향취다. 왜 진작 인삼도 뿌리채소 중 하나라는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흑심 가득한 효능에 가려져 있던 맛의 본심이 고개를 든다. 인삼도 꽤 매력적인 솥밥 재료다. 앞으로 인삼을 수확하는 가을마다 찾게 될 맛이다.

강렬한 개성마저 감싸 안는 포용
인삼값이 폭락해 밭까지 갈아엎는다고 한다. 그 인삼들, 어디 잘 쓸 곳 있을까 궁리하는 게 요즘 일이다. 참고로 손가락 굵기의 3년근이나 그보다 두 배는 굵은 5년근은 과장된 평판의 6년근보다 한참 저렴하면서, 맛에서나 들어 있는 성분에서나 유의미한 차이가 없다는 것이 전문가의 코멘트. 그리하여 3년근과 5년근 두 종류로 김치냉장고 한 칸을 다 차지한 산더미 같은 인삼. 여기저기 이야기를 나누며 각양각색으로 메뉴 개발을 의뢰하고 있다.
남에게 맡겨두고 마냥 강 건너 불구경만 할 수도 없는 도리니, 나 자신도 인삼을 자주, 많이 먹을 수 있는 식생활 속 묘안을 짜내야 하는 처지가 됐던 것이다. 며칠 내 몫의 인삼 더미를 째려보기만 하다가 나름 고안한 방책이 바로 솥밥. 솥밥은 인삼쯤 되는 강한 재료도 포용한다. 갓 지은 밥이 내는 강렬한 향(갓 한 밥은 못 참지!)이 인삼 향에 지지 않으면서 서로 상승작용을 일으키는 것이 인삼솥밥이 매력적인 이유다. 흰 백지장 같은 쌀은 그 어떤 개성의 재료도 느긋한 마음으로 감싸 안으며 다른 개성이 가져오는 변화에 순응하는 힘이 있다. 인삼을 넣은 솥밥은 마치 백지장이 한지가 되는 것처럼 새로운 결이 생겼다.
사시사철, 걸핏하면 솥밥을 지어 먹는다. 냉동실에 얼려둘 밥은 큰 솥에 많이 짓는 의무 노동 같지만, 딱 한 끼 분량만 짓는 솥밥은 퇴근 후 여가시간처럼 설렌다. 어렵지도 않다. 밥 한두 공기도 잘 지어지는 아주 작은 무쇠솥 하나 있으면 그 어떤 메뉴 걱정도 필요 없어진다. 아무리 정성을 들여 시간을 써봐도 쌀 불리고 재료 준비하는 시간이 20분, 끓은 후 밥 짓기까지 20분, 뜸 들이는 데 15분, 상 차리는 데 5분. 길어도 1시간이면 된다. 무쇠솥을 중심으로 작은 찬 몇 개만 놔도 보기에도 좋고 맛도 좋은 한 끼 차림이 마련된다. 손님을 초대했을 때도 이토록 요긴할 수가 없어 빼놓지 않는 레퍼토리다. 아니나 다를까 ‘#집콕 #집밥’ 해시태그가 쉴 틈 없었던 2021년 내내 솥밥은 그 ‘인스타그래머블’한 우성 비주얼 덕분에 작은 유행이 됐다고.
냉장고 사정이 궁색할 때야말로 솥밥이 만만하다. 냉동실에 얼려둔 야생 표고버섯이나 펀치볼 시래기, 아니면 잔멸치 한 줌만 끄집어내도 채소칸 자투리 재료와 함께 그럴싸한 한 끼를 지을 수 있다. 표고버섯은 물에 담가 해동해 종종 썰어 국간장과 참기름에 볶아 준비하고, 버섯 불린 물로 쌀을 안쳐 볶은 버섯을 듬뿍 올리는 것으로 끝. 당근이 있다면 색이 예뻐지지만 없어도 그만. 양구 펀치볼 지역이 명산지인 시래기는 뚱뚱하게 불린 후 쌀에 석석 섞어서 그대로 밥을 짓는 것으로 충분. 들기름에 서니사이드업으로 후딱 구운 달걀 프라이까지 곁들이면 금상첨화. 잔멸치는 기왕이면 잡내 없는 세멸을 건조하게 볶은 후 밥 짓는 솥에  솔솔 뿌려 깔고 그저 쪽파나 조금 썰어 넣는 것으로 마무리. 만만한 솥밥 3대장이다.

솥밥에 담는 계절 미각
걸핏하면 짓지만, 특별하게 지을 일도 철마다 있다. 제철의 맛을 화려하게 즐기기에도 솥밥이 적당하다. 모두 다른 절기마다 모두 다른 매력의 제철재료가 나오는데, 그걸 한 데 놓고 서로 조화롭게 아우르는 제철 솥밥으로는 달력도 만들 수 있을 것만 같다.
가을 내내, 나의 계절감은 작은 솥 안에서 낙엽의 색으로 넘실댄다.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버섯과 기름지게 맺힌 열매, 충실하게 차오른 뿌리채소를 듬뿍 넣은 가을 솥밥은 쌓인 낙엽 아래 퇴적된 비옥한 토양 같다. 밤고구마와 토란, 연근, 우엉, 밤과 은행 그리고 가을 한때 나오는 야생버섯 몇 가지, 또는 그저 대형마트만 가도 다양한 신품종 재배 버섯 한 줌 있으면 솥 안에 가을이 한껏 담긴다. 
한편 수꽃게가 살이 쪘다는 소문이 들려온다. 바다에도 가을이 왔다는 의미니 게살을 듬뿍 올린 게살 솥밥도 먹고 넘어가야 한다. 게살을 박박 긁어내 수북하게 얹고 솥밥을 지어 흰 식초를 넣은 새콤한 간장에 고추냉이만 조금 곁들이면 엄청난 대접을 받는 기분이 든다. 달걀지단을 잘게 찢은 게살만큼 얇게 채쳐 듬뿍 올리면 색의 조화도 업그레이드되고 맛도 무척 잘 어울린다.
겨울의 솥밥은 편파적으로 바다의 편이다. 찬 바닷물에서 딴 겨울 굴의 맛을 어디다 비견할까. 서해의 알굴은 향이 짙고 작은 몸집이 옹골차다. 향이 빠지지 않게 살짝 씻어 무채 위에 딱 몇 알 올리는 것으로 충분히 향이 밴다. 여기에 매콤한 어리굴젓을 반찬으로 한 겹 더 얹어 먹는 것을 나는 최고로 친다. 반면 통영 등 남쪽의 수하식 굴은 덩치도 크면서 농후하고 기름지기에 그대로 솥밥을 짓기보다는 올리브유나 버터에 구워 그 장점을 극대화해 솥밥을 하면 더욱 맛이 좋다. 
금눈돔은 생선 솥밥 중 최고다. 포를 떠 살짝 말린 금눈돔을 향 없는 기름에 껍질이 바삭하도록 구워 뜸들이는 솥밥 위에 울긋불긋하게 놓는다. 껍질에 농축된 기름진 고소함과 흰살에서 은은히 올라오는 투명한 고소함이 일품이다. 제주의 옥돔이나 도미, 눈볼대 등 다른 흰살생선으로도 이 고급스러운 솥밥을 할 수 있지만, 금눈돔의 화사하고 또렷한 붉은 색은 대체 불가다. 
봄의 솥밥에는 순한 초록이 담긴다. 도톰한 두릅과 알싸한 냉이와 달래를 기다린다. 브로콜리 같기도, 아스파라거스 같기도 한 두릅은 개두릅, 땅두릅, 참두릅 가리지 않고 밥에 넣는다. 향이 강하기에 흔히 먹듯이 끓는 물에 데쳐 초장 찍어 먹는 것도 좋지만, 뜨끈한 밥 위에 쪄진 두릅은 살짝 텁텁한 그 향이 밥 향에 안기며 부드럽게 변모한다. 냉이장, 달래장도 봄이 향 진한 제철이니 꼭 챙겨 솥밥 옆에 종지를 놔야 한다. 
굵은 아스파라거스가 힘차게 땅 위로 솟는 때이니, 짠 물에 데친 작은 새우살을 넣은 새우 아스파라거스 솥밥도 놓칠 수 없다. 이 시기 국내산 아스파라거스는 굵어도 억세지 않고 생으로 먹어도 달콤할 정도라 처음부터 푹 익히지 않고 살캉살캉함이 남도록 뜸 들일 때 올려 가볍게 쪄지도록 해야 맛이 좋다. 
그리고 비로소 여름이 되면, 밭이 미어지도록 자라는 한여름의 화려함이 펼쳐진다. 완두콩부터 시작해 울타리콩, 호랑이콩까지 온갖 색과 무늬를 가진 콩도 쏟아져 나와 콩밥 또한 이때 가장 맛있게 먹는 솥밥이다. 말린 저장 서리태 넣은 콩밥 말고, 밭에서 막 딴 제철 콩의 생기 넘치는 파삭한 고소함을 즐길 수 있는 한때다. 다른 재료 아무것도 필요 없이 오직 콩만 종류대로 넣어 차례로 솥밥을 지어먹기 바쁘다.
여름 뙤약볕에 맛이 진하게 든 토마토는 솥밥용 토마토가 따로 있다. 완숙토마토 중에서도 정말이지 너무나 완숙된 나머지 칼끝만 대도 터질 정도로 완전히 무르익은 것을 골라야 한다. 냄비 속 쌀 가운데에 껍질 벗긴 토마토 한 알을 반쯤 묻히도록 콕 박아 올리고 올리브 오일을 살살 둘러 밥을 지으면 즉석 토마토 리소토 같기도 한 토마토 솥밥이 완성된다. 거칠게 후추를 뿌리고 탱글탱글한 밥알 사이로 녹아든 토마토를 적당한 비율로 섞어 먹으면 아무 반찬 없이도 나른한 여름 입맛이 싱그러워진다. 
사계절의 색이 다 다르듯 맛도 다 다르다. 세월이 흐르는 것이 서럽지만은 않은 것이 철마다 고유의 미각을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을 온전히 즐기는 한 방법으로서의 솥밥. 올 한 해도 역시, 아니 올 한 해라서 유독 더 솥밥 덕분에 다시금 활력을 찾곤 했다. 솥밥의 다른 말은 ‘위로’라 할 만했다. 지난달에 시작된 ‘위드 코로나’도 ‘코로나19’가 시작되던 때만큼이나 앞날을 예측할 수 없는 시기지만, 내년 한 해가 다만 그 누구에게도 위로 따위 필요하지 않은 한 해가 되길 바란다. 철마다 새로 채워지는 새로운 미각의 기쁨을 빠짐없이 맞닥뜨리길 바란다. 때로 소박하고 때로 호사스러운 일상이 때로 익숙한 편안함으로, 때로는 화사한 기쁨으로 채워지는 충만한 안정감의 증거가 솥밥의 본뜻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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