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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잘 먹는다는 것의 합집합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2022년 01월호
 

“먹는 거 잘 드시고.” 의사가 말했다. 
“잘 먹어야 해요.” 한 층 내려가니 약사도 똑같이 말했다. 
“걱정 마세요. 제 직업이 잘 먹는 겁니다!” TMI(too much information)를 힘차게 외칠 뻔했다. 잘 먹는 게 일인 푸드 칼럼니스트에게 잘 먹으라니, 외치고 싶긴 했다. 
그런데 돌아오는 길 신호 대기 중에 문득 커다란 인지 부조화가 오고 만 것이다. 잘 먹으라니. 이런 풍족한 시절에 잘 먹으라니. 야산에서 칡뿌리만 캐 먹고 있을 것 같은 입성으로 보였나? 입고 간 코트가 너무 낡긴 했지만. 아니면 무리한 다이어트라도 하는 걸로 보였던 건가? 전혀 마른 체형이 아닌데 혹시 실패한 다이어트? 아니면 비타민이나 오메가3조차 잘 알지 못하는 영양제 기피 야만인인 걸 들켜버린 건가? 
원론적인 의문이다. 알았다고 생각한 것을 갑자기 모르게 될 때의 갑갑함이다. 잘 먹는다는 것은 무엇인가. 일단 상해 버린 고기나 곰팡이 난 빵을 먹는 것은 잘 먹는 것에 포함되지 않는다. 식품의약품안전처에서 먹지 않도록 규제하는 것들도 당연히 잘 먹는 범위 밖의 것이다. 잘 먹지 못하는 것에 대한 소거법은 무척 쉽다. 반대로, 잘 먹는 것에 대한 정의는 바로 나오지 않는다. 그 갭 사이에서 나는 우선 무지를 인정했다. 나는 잘 먹는 게 무엇인지 그 의미를 진정은 모르고 잘 먹는 일을 했다. 그러고 보면, 단 한 번도 진지하고 깊게 고민해 본 적이 없는 주제였다.

각자 정의하는 ‘잘 먹음’이란?
식사를 마친 후 ‘잘 먹었다’고 생각한 일이 그러고 보면 없다. 
‘맛있다’가 대부분이다. 이따금 ‘이러고 저러해서 무척 별로’라고 비판하게 되는 경우도 있기는 하다. 아니면 ‘배부르다’고 생각하는 때도 종종 있다. 배부르게 맛있게 먹는 것은 배부르고 맛있게 먹은 것이지, 잘 먹는 것과는 뭔가 다르다. 
그렇다면 잘 먹는다는 것은 영양이 풍부한, 즉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먹는다는 의미인가. 여름 삼복 제철에 삼계탕이나 장어구이를 먹고서 든 생각도 마찬가지로 ‘맛있다’, ‘배부르다’ 아니면 ‘맛이 없어’였다. 보양식이라 해서 내가 찾고 있는 잘 먹음에 해당하는 것도 아닌 것 같다. 영양 과잉 시대에 칼로리 높은 음식을 먹는다고 해서 ‘아자아자! 원기가 충만해졌어!’라고 체감하는 일은 사실 없지 않은가.
제철 진미를 먹는 것은 어떨까. 이를테면 지금 계절의 고소한 지방이 가득 오른 방어? 회로도 먹고 탕이나 조림으로도 진득하게 먹으면 맛이야 있을 것이다. 어쩌면 배부르게 먹게 될 수도 있고. 하지만 지난가을 꽃게를 먹었을 때 맛도 있고 배도 불렀지만, 딱히 ‘잘 먹었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으니 겨울 방어라 해서 잘 먹었다는 데로 이어지진 않을 것 같다.
다음 가설로, 식탐이 충족되는 경우는 어떨까? 내 경우엔 비정상적으로 식탐이 강해서, 먹고 싶은 것을 제때 먹지 못하면 식탐의 허기가 달래지지 않고 정서적으로 상당히 괴로운 상태가 된다. 그 대상이 캐비어나 푸아그라, 아니면 샥스핀 같은 호화로운 식재료인 것은 딱히 아니고, 대개 익숙하게 먹는 음식이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맹렬하게 먹고 싶어지는 증상이다. 그 대상은 슬라이스 치즈를 얹은 짜장라면이나 떡볶이일 때도 있고, 애호박전이나 깐풍기, 때로는 구체적으로 어느 패밀리 레스토랑의 투움바 파스타일 때도 있어서 종목은 꽤 뜬금없는 편이다. 그런 열병 같은 음식을 먹고 나서 ‘잘 먹었다’는 생각을 하는가? 그것도 아니다. 이때도 ‘맛있었다’, ‘배부르다’다. 좀 달리 ‘재밌었다’일 때가 있긴 하다.
하염없이 밀리는 도로를 헤치고 집에 돌아와서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세상이 좋아져서 이럴 때 집단 지성을 빌리기가 참 편해졌다. SNS에 질문을 던졌다. 다양한 사람의 다양한 해석이 답글로 돌아오기 시작했다.
“끼니 거르지 않고 골고루 먹는 것”은 두 자녀를 둔 40대 남성의 답이었다. 이 댁은 부인이 전업주부라 매일 정성 들인 집밥을 먹는다. “나쁜 것 먹지 않고 샐러드나 생선 같은 좋은 식재료 위주로 먹는 것 아닐까요?”라는 답도 있었다. 하긴 요즘 공장식 축산의 여러 가지 문제를 의식하며 채식에 나선 분이 많아지긴 했다. “언니가 알려준 매운탕을 드디어 먹는 그런 것”이라는 답글도 있었다. 제주시 한 횟집 매운탕 얘기를 1시간 내내 했더니 기어코 휴가 때 갔다. 알려준 덕분에 잘 먹었다는 답례도 빼먹지 않았다. “맛, 양, 영양 면에서 단 하나라도 만족스럽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영양제를 무척 잘 챙기는 미식가이자 대식가인 친구의 답글이었다. 
이 외에도 며칠 동안 “푸짐하게 먹는 것”, “끼니를 거르지 않는 것”, “뿌듯하게 먹는 것” 등 다양한 생각이 담긴 다양한 답글이 달렸다. 심지어 “SNS에 올릴 만한 음식을 먹는 것”이라는 답도 있었다. 답변의 내용이 다 다른 만큼, 모두가 정답이라고 생각하는 ‘잘 먹음’의 정의는 달랐다. 
이럴 때 아르키메데스가 외쳤던 말이 “유레카!”였던가? 잘 먹는다는 것은 원체 그렇게 다양한 의미였던 것이다. 내게 지성을 빌려준 이들은 각각의 사정과 배경이 모두 다르고, 그 안에서 각자 나름의 ‘잘 먹음’을 정의하고 영위하고 있었다. 그들 각각의 ‘잘 먹음’이 한 치의 틀림도 없었다.

올해의 다짐,
좋아하는 음식을 느긋하게 먹을 여유 갖기

때로 진실은 교집합에 있지 않고 합집합에 있다. 합집합에 진실이 있을 때 그 진실은 하나로 정의되지 않는다. 잘 먹는 것이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는 모두가 다르고, 모두가 옳다. 그리고 잘 먹는다는 것은 결국 각자의 각기 다른 방법으로 건강을 유지하며 행복을 추구하는 것, 그러니까 근본적으로 진취적인 삶의 태도에까지 닿아 있었다. 
여러 답글 중 내게 가장 공감됐던 ‘잘 먹음’의 정의는 요리연구가 H 언니로부터였다. “대충 때우지 않고 좋아하는 음식을 시간을 들여 먹는 것.” 나의 정의와 큰 교집합을 이루는 한마디, 요즘의 나를 돌아보게 만든 한마디였다. 좋아하는 음식을 참지 않을 것. 먹고 싶은 음식이 있을 때 그 욕구에 인색하게 굴지 않을 것. 단지 배를 채우기 위해 양과 칼로리를 허겁지겁 채우지 않을 것. 나에게 맛과 향과 포만감과 재미까지 모두 음미할 여유로운 시간과 정신의 평안을 허락하는 것. 잘 먹기 위해, 그러니까 건강하고 행복한 사람이 되기 위해 내가 가져야 할 진취적인 삶의 태도다. 
요사이 좋아하는 음식을 느긋하게 먹을 여유 없이 삼각김밥이며 과자로 대충 때우며 산 것을 생면부지의 의사에게도 약사에게도 다 들켰던 모양이다. 운 좋게도 2022년이 마침 시작됐다. 이번에야말로 작심삼일이 되지 않을 새해 다짐을 해본다. 대충 때우지 않고 좋아하는 음식을 시간을 들여 먹는, 내 안의 들짐승 같은 식탐에 인색하지 않은 사람이 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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