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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창기의 영화상담실
변화는 힘의 균형이 깨져야 가능하다
김창기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 2022년 01월호
 

주인공 댄은 사춘기 딸 셋을 키우는 싱글 대디다. 그는 작은 신문사에서 가족 고민을 상담해 주는 칼럼니스트지만 사실 자기 코가 석자다. 아직 어려서 운전은 위험하다는데도 운전을 배우겠다고 고집 피우며 사사건건 말싸움을 거는 고등학생 첫째 딸, 중학생은 사랑하기에 너무 어린 나이라고 아무리 가르쳐도 첫사랑에 빠져 사내와 키스를 하는 둘째, 초경을 시작한 후 아빠를 우습게 보기 시작한 초등학생 셋째. 아빠와 딸들은 자꾸만 서로 의도하지 않았던 상처를 주고받는다. 4년 전 세상을 떠난 아내를 잊지 못해 외롭고, 혼자 하는 육아로 힘들고 슬프다. 실생활에서의 댄은 행복하지 않다. 
명절날 아이들과 본가에 간 댄은 책방에서 매력적인 여인 앤 마리를 만난다. 아내가 떠난 후 처음으로 이성에게 강렬한 사랑의 감정을 느낀 댄. 그런데 그 여인이 바람둥이 꽃미남 남동생의 애인이라니! 애써 감정을 가라앉히려는 댄의 노력은 무용지물이고. 그러다 앤 마리도 댄에게 조금씩 빠져든다.
이렇게 영화가 막장이 되려는 순간 딸들이 나선다. 댄과 앤 마리가 얼결에 입을 맞추는 장면을 목격한 첫째 딸은 아빠를 보호하기 위해 잔소리 폭격을 시작한다. 둘째 딸은 아빠는 사랑을 할 줄 모르는 겁쟁이라며 “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사랑할 수 있는 능력”이라고 꾸짖는다. 고민에 빠져서 막내와의 면담을 잊은 댄에게 막내는 아빠는 이기주의자라며 울다가, 아빠를 용서하고 앤 마리를 놓치지 말라고 조언한다. 
이런 딸들의 모습에서 댄은 아내와 나이든 어머니의 모습을 발견한다. 아이들이 어른이 돼가고 있는 것이다. 어른이 돼가는 청소년을 키우는 아빠의 역할은 관리자가 아니라 선배처럼 관심을 갖고 이해해 주려 노력하고, 친구처럼 공감해 주고 응원하는 것이다. 도움을 청할 때 도와줘야 한다. 
이 영화는 좋은 아빠가 되고 싶은 조바심에 너무 앞서 나가며 실망하고 자책했던 내게 큰 위로가 됐다. 정신건강의학과 의사 입장에서 상담할 때는 객관성이란 거리를 유지할 수 있지만 아빠일 땐 그 거리가 매우 어렵다. 처음 해보는 부모 노릇은 늘 힘들기에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우리를 위로하고 타일러 줄 부모님, 선생님 등 의지하고 신뢰할 수 있는 어른의 음성이 필요한 것이다. 
하지만 우린 무엇을 할 수 있는 능력을 얻어 주어진 과제를 수행할 수 있는 가능성이 열리는 근접발달영역에 들어섰을 때에야, 그 과제를 수행하고 싶거나 할 수밖에 없을 때가 돼서야 도움이 되는 음성을 들을 수 있게 된다. 그 전까지는 그저 소음에 불과하다. 댄의 아이들을 위한 조언도 대충 그 수준이었던 것이다. 조금 기다려줘야 한다.
다른 어른들이 건냈던, 새로운 사람을 만나라는 조언도 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댄이 다시 사랑에 빠지고, 그 사랑으로 인해 균형 잡힌 어른으로 돌아오기 위해서는 빈 공간이 필요했다. 댄은 두려움 때문에 딸들의 성장과 독립을 허락하지 않는 강박적인 양육에 집착했었다. 당연히 행복할 수 없었다. 결국 딸들에 의해 집착을 반강제적으로 내려놨을 때 빈 공간이 생겼고, 사랑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다. 변화는 힘의 균형이 깨져야 가능하다.
그 누구도 헛살고 싶지 않다. 다만 어떻게 의미 있는 삶을 살 수 있는지 모를 뿐이다. 그 방법을 혼자 힘으로 찾아내기는 힘들다. 더 현명한 타인의 도움이 필요한데, 나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은 타인도 믿지 못한다. 영화에서 댄의 가족은 자신을 믿지 못하는 사람을 돕는 방법을 잘 보여준다. 바로 애정을 갖고 상대방을 관찰하고 상태를 잘 이해하고 조금씩 다가가서 의지할 수 있다는 믿음을 키워주는 것이다. 발전과 사랑과 평화는 그런 믿음에서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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