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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특별한 새해 결심
김혼비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저자, 에세이스트 2022년 01월호
연말에 지난 다이어리를 정리하면서 근 5년간 새해마다 다이어리 첫 장에 적어놓은 계획과 목표를 살펴봤다. 조목조목 다른 말로 적혀 있지만 결국은 “올해도 열심히 일해 보자!”라는 한 문장으로 수렴할 수 있는 다짐들이었다. 회사일도 열심히 하고, 글도 열심히 쓰고, 간간히 강의도 열심히 하는 한 해를 보내자는. 새해 다짐이라는 것이 원래 아무리 야심차게 세워놔도 1월이 채 지나기 전에 이미 목표 실천 수치가 반토막 나 있기 마련이고, “한국인에게는 음력설부터가 새해지!”라며 2월에 새롭게 야심차졌다가도 벚꽃이 피기 전에 다시 반토막 나기 마련이라는 점을 감안해 애초에 실현 가능성의 2배수 정도로 목표치를 정해 놨다고는 하더라도 열심, 열심, 그놈의 열심, 좀 징그러웠다. 
하지만 올해는 달랐다. 다이어리 첫 장에 단호하게 적은 것이다. “일을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이기.” 연재하기로 한 것만 빼놓고는 외부원고도 가능한 한 받지 말고, 강의나 행사도 대폭 줄이고, 회사에서도 시간이 많이 드는 새로운 일 벌이지 말고 주어진 것만 딱 부러지게 하기. 
워커홀릭 기질이 다분한 데다가, 무엇보다 자본주의사회에서 ‘열심’을 내려놓을 배짱이 없던 내가 (나로서는 제법 파격적인) 이런 다짐을 한 것은 전적으로 이수은 작가가 쓴 고전 독서 에세이 『평균의 마음』 때문이다. 지난해 말, 교보문고에서 ‘올해의 책’ 한 권을 뽑아달라고 요청했을 때도 나는 수많은 책 속에서 조금의 망설임 없이 이 책을 고르며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썼다. “이 책을 읽는 내내 나는 나와 다른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 어떤 일에 의견 하나를 갖는 데에 있어 이만큼 치열하게 고민했었나 되돌아보게 되었다. 내가 한 번 고민할 때 이수은은 수백 번 고민한다. 철학부터 과학까지 여러 학문을 넘나드는 지성과 쉽게 희망을 버리지 않는 열린 마음으로. 세상에 대한 타당한 해석력을 갖고자 최선을 다해 분투하는 단단한 여정이 담긴 책.”
그러니까 『평균의 마음』을 읽고 올해 일을 줄이겠다고 다짐한 것은 나도 수백 번까지는 못되더라도 수십 번은 고민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다. 해박한 지식, 지식을 적재적소에 사용해 사유를 넓히는 강력한 지성, 지성을 바탕으로 때로는 담대하게 내딛는 독창적인 해석력
(이를테면 ‘오스틴주의자’로서도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제인 오스틴의 큰 한계를 지적하는 대목,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그가 가진 ‘중독증’과 연관지어 분석하는 대목, 빅토르 위고와 발자크를 대비시켜 설명하는 대목, 그 밖에도 피츠제럴드, 헤밍웨이, 카프카 등에 관한 분석들은 감동적이다), 해석을 통해 ‘인간’을 끝까지 이해하고 설명해 보고자 하는 따뜻한 통찰을 두루 가진 이수은의 경지에는 이르지 못하더라도(이번 생에서는 불가능하다), 이수은이 살짝 열어준 수많은 문의 틈새만을 기웃대지 않고 적어도 몇 개의 문 그 안쪽 세계로 성큼성큼 들어가 보고 싶어서다. 

낭만적 감상으로 미화하기에 인간성은 너무도 허약해서, 파헤치면 파헤칠수록 점점 더 잘게 부서지는 파편들의 무더기에 불과하다. 그러나 (......) 인간이 스스로 어느 방향으로든 움직여갈 수 있다는 데 일말의 가능성이 있다. 자기 안의 볼품없는 작은 조각들을 각자가 믿고 바라는 이상과 꿈과 신념을 접착제로 삼아 하나의 인격으로 종합해내는 능력 또한 가졌기에, 우리는 스스로의 힘으로 더 낫고 이로운 삶 쪽으로 나아갈 수 있다. -p.144 

쓰는 대신 더 읽고, 멍때리며 많이 생각하고, 깊이 공부하는 시간들로 채우고 싶다, 올해는. 다른 주파수의 장으로 나를 이끌어준 이 책에게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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