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월 초 미국을 휩쓸고 있는 오미크론을 뚫고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전자제품박람회(CES)에 다녀왔다. CES는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매년 1월에 열리는 세계 최대의 테크놀로지 전시회다. 2021년 CES는 오프라인으로 열리지 못했다. 그래서 2년 만에 열리는 이번 CES에 기대가 컸다. 하지만 갑작스런 오미크론 변이 바이러스 확산으로 올해 CES도 큰 타격을 받았다. 참가를 예정했던 미국의 빅테크 기업들이 연이어 불참을 선언하고 전시회 참관을 예정했던 많은 업계 인사가 출장을 취소한 것이다.
미국과 중국의 큰 기업들이 빠진 이번 CES에서 주인공은 한국 기업들이었다. 전체 2,300여 참여 회사 중 500여 곳 이상이 한국 기업이었을 정도로 비중이 컸다. 특히 전 세계의 스타트업들이 모여 ‘스타트업 올림픽’을 방불케 한 유레카파크 전시관에서는 300곳 가까운 한국 스타트업들이 압도적인 존재감을 보였다. 혹자는 한국 기업과 참관객이 너무 많아 “마치 코엑스에 있는 것 같았다”고 할 정도였다.
코로나19 감염이 우려되는데도 우리 스타트업들은 왜 그렇게 라스베이거스로 몰려갔을까? 과연 그들은 기대한 성과를 얻고 돌아왔을까. 이번에는 CES 유레카파크 현장에서 만난 스타트업들 중 가장 인상적이었던 콥틱의 박형진 대표를 인터뷰했다.
3D 스캐닝 장비로 18개 데이터 추출해 최적의 안경 사이즈와 디자인 추천
“기대가 크지 않았는데 사실 대만족을 하고 왔습니다. 미국시장 진출이 가능하다는 자신감을 얻은 것이 가장 큰 소득입니다.”
콥틱은 ‘브리즘’이라는 안경 브랜드를 가진 스타트업이다. 브리즘은 보통 안경이 아니다. 3D프린팅으로 만든 개인 맞춤 안경이다. “나에게 딱 맞는 안경을 편안한 과정을 통해 믿고 살 수는 없을까” 하는 고객의 문제를 풀고자 박 대표가 시작한 사업이다.
브리즘은 안경을 사는 경험을 IT 기술을 통해 혁신하고 있다. 우선 고객의 얼굴을 브리즘 매장에서 3D 얼굴 스캐닝 장비로 측정한다. 얼굴 좌표 1,221개를 인식해 주요 지표 18개 데이터를 추출한다. 해당 지표와 고객 판매 데이터를 매칭해서 최적의 안경 사이즈와 디자인을 추천해 준다.
고객이 안경 사이즈와 디자인을 선택하면 3D프린터로 개인화된 안경테를 제작한다. 주문한 뒤 완성된 안경을 받는 데 10일 정도 걸린다. 가격은 안경테의 경우 균일하게 18만 원 선이다. 맞춤 양복을 사듯 맞춤 안경을 사는 것이다.
스마트폰으로 얼굴을 비추면 적당한 안경테를 보여주거나 추천해 주는 기술은 이미 나와 있다. 하지만 3D프린터로 맞춤 안경까지 만들어주는 서비스는 전 세계적으로도 흔치 않다. 얼굴 측정에서부터 맞춤 안경 제작까지 가능한 서비스를 만들게 된 것은 박 대표의 이전 창업 경험 덕분이다.
대학 경영학과 졸업 후 P&G코리아, 월트디즈니코리아 등 외국계 기업에서 마케터 등으로 일했던 박 대표는 2005년 첫 창업으로 안경사업에 뛰어들었다. “일본에 여행을 갔다가 현지 안경체인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습니다. 젊은 층을 타깃으로 한 안경 프랜차이즈 사업을 시작했죠. 한때 15개 지점에 100억 원의 매출을 올리는 사업으로 성장시켰습니다.”
8년 동안 안경 비즈니스를 하던 박 대표는 우여곡절 끝에 2012년 손을 떼고 다른 사업을 시작했다. 하지만 안경 비즈니스에 대한 관심은 계속 남아 있었다. “안경산업은 50년 이상 글로벌 제조·유통 기업이 과점하면서 가장 오랜 기간 혁신이 없는 산업 중 하나입니다. 특히 공급자 중심의 제조 환경이 고착화되면서 소비자의 개인화 니즈를 반영하기 어려웠습니다.”
박 대표는 3D프린팅으로 개인화된 안경을 만드는 아이디어를 떠올렸지만 당시 기술 수준이 따라주지 못했다. 그런데 2016년 우연히 지금의 공동창업자인 성우석 대표를 만나게 됐다. 성 대표가 3D프린팅으로 만든 안경을 보니 예상외로 품질이 너무 좋았다. 그래서 다시 안경 비즈니스로 창업을 결심하게 됐다.
CES 2022에서 긍정적 피드백 받아…올해 미국시장 본격 도전
2017년 콥틱을 설립하고 본격적으로 제품 개발을 시작했다. 2018년에는 스타트업들이 몰려 있는 공유오피스에 팝업스토어를 내고 고객들에게 조금씩 제품을 선보였다. 한 번에 10~20개의 안경을 판매하면서 얻은 피드백을 바탕으로 제품과 서비스를 꾸준히 개선해 나갔다. 그리고 이 결과를 바탕으로 2018년 12월 드디어 첫 매장을 오픈했다.
본엔젤스, 카카오벤처스 등으로부터 시드 투자도 15억 원을 확보했다. 지금은 5호점까지 지점을 늘렸으며 1만3천 명 정도가 브리즘 안경을 구매했다. 누적 매출도 50억 원 수준까지 성장했다. 이제 국내시장에서 본격적인 성장을 앞두고 있다. 그러면 왜 지금 CES를 찾았을까.
“한국의 안경시장은 규제는 많은데 경쟁은 치열하고 안경 가격도 낮은 편입니다. 작은 시장이죠. 그래서 처음부터 한국은 테스트베드라고 생각했습니다. 당연히 큰 시장으로 진출해야 합니다. 북미시장은 전 세계 안경시장의 25%인 40조 원에 달하는 거대 시장입니다.”
더불어 미국은 백인, 흑인, 히스패닉, 아시안 등 인종적 다양성으로 얼굴 형태와 사이즈가 사람마다 제각각인데 백인 얼굴형에 맞춘 안경만이 공급되고 있는 형편이었다. 박 대표는 미국시장에서 맞춤 안경의 수요가 더 클 것이라고 판단했다.
게다가 한국은 도수 있는 안경을 온라인으로 팔 수 없는 규제가 있다. 미국의 경우 10여 년 전에 온라인으로 안경을 판매하는 와비파커 같은 회사가 나왔고 지난해 뉴욕증시에 상장해서 약 4조 원 가치의 회사가 됐다. 이런 안경산업의 혁신을 한국에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미국시장의 안경 소비자들은 이미 12% 정도가 온라인으로 넘어갔다. 온라인에서 안경을 고르고, 주문하는 것이 일상화됐다. 그래서 올해는 미국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전하기로 했다. “3월에는 구매에서 맞춤 제작까지 모바일로 끝낼 수 있는 앱을 미국시장에 내놓을 예정입니다. 이런 시기에 CES는 고객의 반응을 얻을 수 있는 너무 소중한 기회여서 참가를 결정한 것이죠.”
박 대표는 이번 CES에서 3가지 목표를 설정했다. 첫 번째는 국내외 미디어에 나와서 인지도를 쌓아가는 것, 두 번째는 현지에 콥틱의 조력자가 될 수 있는 파트너를 만나는 것, 세 번째는 제품에 대한 현지 고객의 솔직한 피드백을 받고 배우는 것이다. 결과는 대만족이었다. 우선 미국 진출을 위해 준비한 메탈 소재 맞춤 안경과 온라인 판매 앱으로 CES 혁신상을 받는 성과를 올렸다. 이번 CES에서 한국 기업은 무려 139개의 혁신상을 수상했는데 그중 하나를 받은 것이다. 덕분에 국내외 언론에 소개되는 기회가 늘어났다.
“방송은 물론 수많은 인플루언서, 업계 관계자, 투자자 분들이 부스를 찾아주셔서 즐겁게 회사를 소개하고 네트워킹을 할 수 있는 기회가 됐습니다. 또 글로벌 대기업의 고위 임원들로부터 긍적적인 피드백을 받았습니다. 이런 일이 저희에게 엄청난 자부심과 용기를 갖게 했습니다.”
브리즘뿐만 아니다. 팬데믹에도 이번 CES에 참가한 수많은 우리 스타트업이 이런 긍정적인 성과를 올렸다. 박세리 선수의 쾌거 이후 한국 선수들이 LPGA를 석권한 것처럼 한국 스타트업의 ‘박세리 모멘트’가 오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번 CES에서 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