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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림동의 헌책방지기
임지영 칼럼니스트 2022년 05월호

 

스쳤던 계절을 다시 만나듯, 흘러간 시절을 다시 만났다. 광주 계림동 헌책방거리에서 말이다. 소멸되는 것들을 사랑해 헌책방을 지킨 문학서점의 정진용 대표는 골목지기, 헌책방지기로 늙어가는 게 소원이라고 말한다.

서점이 처음 문을 열었던 
1980년 5월의 기억   


광주광역시 동구 계림동에는 시간이 비껴간 것 같은 거리가 하나 있다. 한때는 지성인들의 성지로 책 좀 읽는 학생이라면 문간이 닳도록 드나들었다는 ‘계림동 헌책방거리’다. 1980년대만 해도 계림동 오거리에서 광주고에 이르는 700m 거리에는 70여 개의 헌책방이 몰려 있었다. 40년이 지난 지금은 거의 모두 사라지고 5곳만 남아 명맥을 유지하고 있다. 그중에서도 광주고 정문 맞은 편에 위치해 유독 눈에 띄는 랜드마크가 있다. 노란 간판이 정겨운 ‘문학서점’이다. 

“헌책방은 작고하신 어머니가 운영하던 곳이었어요. 가업을 이어받아 하고 있습니다. 지금이야 깔끔하게 새 단장 한 모습이지만 이전에는 책들과 책 꾸러미가 곳곳에 쌓여있던, 기억 속 헌책방의 모습 그대로였어요.” 문학서점의 새 주인, 아니 ‘헌 주인’ 정진용 대표는 말한다. 

문학서점은 1980년 5월부터 시작했다. 공교롭게도 5.18 민주화 운동과 시기가 겹친다. 서점을 연 지 얼마 되지 않아 민주화 운동이 일어났고 거리는 무거운 함성과 매캐한 최루탄 연기로 자욱했다. 서점 바로 뒤에는 가족들의 아담한 보금자리가 있었다. 낮이면 산동네로 피신하고 밤이면 다시 집을 찾는 생활이 한동안 반복됐다. 

그때 그는 겨우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영문은 몰랐지만, 오랜만에 다시 서점으로 돌아왔을 땐 보이지 않는 얼굴들이 있었다. “어머니가 하숙을 치던 대학생 형들이 있었어요. 끼니때면 밥도 국도 함께 먹었으니 식구였죠. 예닐곱 명이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항쟁이 끝나고 돌아왔을 때는 두 명밖에 보이지 않았어요. 나머지는 집으로 돌아오지 않은 거예요. 다들 어디로 간 걸까요? 아무도 말해 주지 않았고 다시는 볼 수 없었어요.” 

서점은 상흔을 딛고 조금씩 일상을 회복해 갔다. 그 사이 한때 ‘광주의 8학군’으로 불렸던 계림동은 새로 들어서는 신도시들 사이에서 점점 작아지고 있었다. 8학군의 자존심이었던 서점과 문구점들은 하나둘씩 자취를 감췄고 빈자리는 흔한 대기업의 영업소 지점이나 프랜차이즈가 채웠다. 그러는 동안에 정 대표는 기타를 연주하고 노래를 하는 뮤지션이 됐다. 음악으로나마 사람들의 마음을 위무할 수 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계림동이 활기를 잃으며 어머니의 서점을 찾는 발길이 점점 줄어들었다. 마음만 먹으면 새 책도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시대에 일부러 먼 걸음을 해 굳이 다른 사람의 손때 묻은 책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기타케이스와 악보를 들고 곳곳을 누비던 정 대표는 2009년 서점으로 돌아왔다. 연로하신 어머니는 홀로 서점을 꾸려갈 힘이 없었고, 인생의 3할을 오롯이 함께했던 서점이 점점 위축되는 것을 그냥 두고만 볼 수 없었던 까닭이다. 

“저는 문학도는 아니지만 서점 같은 곳은 남아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그래야 사회에 온기가 돌 테니까요. 저라도, 아니 제가 헌책방을 지켜야 한다고 생각했어요.” 소중한 기억을 품은 골목이 소멸된다는 건 슬픈 일이다. 그는 공동체를 살리기 위해 역내 독립서점과 중고서점, 그리고 재능기부가 가능한 소상공인, 지역 예술인들과 함께 골목살리기 문화운동을 펼쳤다. 책방 기타 수업도 열고 책 기증 및 나눔 행사도 열고 미니콘서트도 열었다. 2018년에는 동구청의 지원을 받아 노후된 가게 재단장 작업을 펼치기도 했다. 

문학서점은 먼지 폴폴 날리는 헌책방에서 세련된 공간으로 변신했다. 계림동 헌책방거리가 달라졌다는 소문이 나면서 인근 주민들은 물론, 멀리서도 젊은이들이 삼삼오오 찾아오기 시작했다. “책을 구입하진 않더라도 빈티지 감성을 느끼며 사진 찍으러 오는 분이 많습니다. 젊은 세대가 그렇게라도 책을 접할 수 있다면 좋겠어요.” 

다 떠나도 누군가는 남아 
이곳의 흔적 지켰으면 


정지된 듯 멈춰섰던 공간은 조금씩 활기를 되찾기 시작했다. 문학서점은 불교서적과 인문사회서적, 종교서적과 소설, 철지난 무협지까지 다방면의 서적을 취급한다. 서적의 출처가 다양한 만큼 다양한 시간과 공간이 교차한다. “이용섭 현 광주광역시장도 계림동 헌책방에서 책을 사서 행정고시 준비를 했다더군요. 오래전 까까머리로 서점을 드나들던 학생들이 지금은 구청장이 돼 있고 국회의원이 돼 있어요. 그만큼 유서 깊은 곳입니다. 헌책방거리만 둘러봐도 도시의 역사를 꿰뚫을 수 있을 정도로요.” 

요즘은 인터넷 판매도 한다. 구하기 힘든 책은 원가의 몇 배에 판매되기도 한다. 누군가의 손을 거친 책이 서점으로 들어와 또 다른 주인을 찾아갈 때 그는 보람을 느낀다. “헌책은 새 책과 달리 누군가의 세월이 묻어 있고 흔적이 남아 있어요. 친구에게 책을 선물하며 쓴 메시지도 있고 연애편지도 들어 있고 애써 말린 가을 국화꽃 갈피도 들어 있지요. 사람들은 헌책의 냄새를 얘기하지만, 저는 헌책의 질감이 좋아요. 책장을 넘기는 순간 느껴지는 투박하면서 따스한 그 느낌은 헌책이 아닌 다른 것에서는 느낄 수 없어요.” 

헌책이 담고 있는 따스한 마음을 전하고자, 헌책방지기는 오늘도 부지런히 내일을 준비한다. 책을 고르고 기타를 튕기면서 말이다. 영원한 것은 없고, 모든 것은 언젠가는 막을 내린다. 그러나 그 속에서 끝끝내 살아남아 영속성을 유지하는 것들도 있다. 꿈을 꾸며 책방을 드나들던 사람들에 대한 기억, 비 오는 날 다락방에 숨어 읽었던 만화책의 냄새, 그리고 무심코 펼친 헌책에서 발견한 누군가의 애달픈 마음 같은 것들 말이다. 

“여기에 우리가 여전히 있다는 걸 보여주고 싶어요. 헌책방이 사라지고 책이 사라지는 시대에도 사명처럼 헌책과 책방을 지키는 문지기가 있다는 걸. 돌아올 곳이 있어야 하잖아요? 떠난 마음이 다시 안착하려면.” 

다시 5월이 오고 있다. 그리고 그는 책들의 종점, 계림동 헌책방거리에서 아직 돌아오지 않은 기억들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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