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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의 기대는 공정한가요?
김혼비 에세이스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 저자 2022년 05월호
 
 

가끔씩 사는 게 무겁고 버거울 때면 우주에 관한 다큐멘터리를 찾아보곤 한다. 칼 세이건의 책 『코스모스』를 바탕으로 만든 <코스모스> 시리즈나 <대우주> 시리즈 같은 고전부터 <노바: 토성 탐사선의 마지막 임무> 같은 비교적 최근 작품들을 찾아보기도 하고, 유튜브에 대중없이 올라와 있는 은하계 영상 등을 멍하니 보기도 한다. 몇 백 광년 단위의 광활한 우주의 세계를 헤매다 보면 인간사에서 부딪히는 문제들이, 그리고 나라는 존재가 한 톨의 우주 먼지만큼 아주 작고 사소하게 느껴지는데[심지어 다중우주론까지 가면 저 광활한 우주조차도 한 톨의 먼지가 돼버리니 나와 나를 둘러싼 모든 것은 거의 무(無)로 수렴된다], 그 느낌이 가져다주는 커다란 해방감이 있기 때문이다. 너무 커서 소화할 자신이 없던 문제들도 우주로 가져가서 작고 작게 만들면 비로소 삼켜 넘길 수 있었다.

『나의 덴마크 선생님』에서 작가 정혜선은 이와 정확히 반대되는 선택을 한다. 삶이 고통스럽고 끝 모를 우울과 무기력이 덮쳐왔을 때, 그는 덴마크로 날아가 세계시민학교(IPC; International People’s College)의 학생이 돼 세계와 접속하고 지구에서 벌어지고 있는 각종 복잡다단한 인간사들과 정면으로 마주한다. 여느 학생들의 두 배에 가까운 나이와 언어의 장벽으로 학기 초반에 고전했던 과정까지도 그는 값진 배움으로 녹여내며, 수많은 사람이 죽어나가는 전쟁의 현장에서 몇 번의 죽을 고비를 넘기고 탈출한 시리아 친구들의 이야기부터, 자신들을 “기후변화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은 첫 번째 세대이자 행동할 수 있는 시간이 있는 마지막 세대”로 정의하고 기후위기에 대응할 구체적인 방안들을 모의하는 유럽 친구들의 이야기까지 ‘나의 이야기’로 마음으로부터 끌어안는다. 타인의 일로만 여겼던 난민 문제, 젠더 문제, 소수자 인권 문제, 기후위기를 앞세운 환경 문제 같은 거대한 문제들이 ‘나의 일’이 된 것이다. 그가 그렇게 자신의 존재를 점점 확장하며 인류와 관계를 맺어나가는 모습을 보면서 나도 더 이상 우주 먼지가 아닌,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구인으로서 가져야 할 무거운 책임들을 제대로 받아 들고 매순간을 살아야겠다는 다짐을 거듭했다. 인류적 삶에 대한 자각이라고 할 수 있는. 

또 하나 내 마음을 크게 뒤흔든 것은, 학기가 끝난 후 지난 학기를 돌아보는 평가회에서 IPC가 학생들에게 나줘준 평가문항지의 내용이었다. IPC에 오기 전에 어떤 기대를 했는지, 스스로에 대한 기대는 무엇이었고 그 기대가 채워졌는지, 동료 학생들에 대한 기대는 무엇이었고 그것은 채워졌는지, 선생님들에게는 무엇을 기대했고 그 기대는 채워졌는지, 학교 직원들에게 무엇을 기대했고 그것은 채워졌는지를 차례대로 물은 후에(여기까지는 평범한 평가문항들이었는데) 이어지는 질문이 다음과 같았다.

생각해 봅시다. 당신의 기대는 공정한 거였을까요? 그 기대를 충족시키기 위해 스스로 무언가 해 보았나요? -p.96 

이 질문을 읽는 순간 (정혜선의 표현을 빌리면) “토르가 휘두르는 망치 묠니르에 얻어맞은 것” 같았다. ‘공정’이라는 표현이 남용되는 이 시대에 ‘공정’이 향해야 할 본질에 맞닿은 느낌이었고, 그동안 표현되지 못한 채 마음속을 부유하던 어떤 고민에 언어를 찾은 느낌이었다. 이 밖에도 정혜선을 경유해 이 책에서 얻은 배움들이 많다. 팬데믹에 전쟁까지 겹쳐 (작가 오르한 파무크의 표현을 빌리면) “중세가 다시 도래”한 듯한 이 시대에 100년이 넘게 굳건히 서 있는 IPC가 전하는 이야기들이 참 마침맞게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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