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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라질은 왜 축구를 잘할까?
배상범 KOTRA 브라질 상파울루무역관장 2022년 05월호


한고조 유방을 도와 천하통일의 대업을 이룬 명장 한신이 젊은 날 동네 건달의 가랑이 밑을 기었던 흑역사는 많이 알려져 있다. 그러나 ‘축구의 대명사’ 브라질이 ‘남미 축구계의 동네북’이었던 흑역사는 잘 모를 것이다.

‘동네북’ 브라질 축구, 인종차별 벽 허물면서 비상···펠레가 불붙인 부정부패 개혁은 여전히 진행 중 

브라질은 1914년 축구협회 창립 직후 대표팀 첫 공식 시합에서 아르헨티나와 붙었다. 결과는 0:3 완패. 이후 국경을 맞댄 축구 강국 우루과이와 아르헨티나에 밀리고 치이면서 브라질은 남미 약체팀의 설움에서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한다. 1930년 개최된 제1회 월드컵에서도 첫 상대 유고슬라비아에 1:2로 분패한 브라질은 우루과이, 아르헨티나가 불참한 1938년 프랑스 월드컵에서야 의미 있는 성적(3위)을 거두게 된다. 브라질이 월드컵 우승 기록을 시작한 것은 첫 월드컵 이후 28년이 지난 1958년 스웨덴 월드컵부터다. 이때 준결승에서 해트트릭을 기록하고 결승전에서 두 골을 넣은 열일곱 살 축구 신동 펠레의 역사도 함께 시작된다.

대한민국이 ‘역동성’의 나라라면 브라질은 ‘다양성’의 나라다. 다양한 인종과 계층이 큰 갈등 없이 조화롭게 살아간다. 개인적 거주 경험을 바탕으로 북미 최대 국가인 미국과 남미 최대 국가 브라질을 비교하면 상대적으로 미국은 다양한 인종·계층이 ‘모자이크’를 이루며 살아가는 사회이고 브라질이야말로 ‘멜팅 팟(melting pot)’이란 느낌을 준다.

브라질 축구 역사 초기에는 축구 클럽 선수 대부분이 백인이었다. 클럽 구단주도 부유한 백인이었고, 선수들을 지휘하는 감독도 백인이었다. ‘남미의 월드컵’으로 불리는 코파 아메리카의 1921년 대회 때는 브라질 출전 선수 전원을 백인으로 구성하라는 대통령 지시까지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 1920년대 초 혼혈 선수가 포함된 축구 클럽이 리그 우승을 차지한 후 브라질 축구계에서는 인종적 개방과 제한의 상반된 움직임이 10년간 충돌한다. 그러나 1930년대 프로 리그가 활성화되고 클럽 간 경쟁이 격화되면서 실력이 뛰어난 선수 영입 수요가 더 높아지게 된다. 자연스럽게 인종 구분보다 실력이 우선시되고 브라질 축구 리그에서 흑인, 혼혈 선수의 비중이 빠르게 늘어났다.

브라질 국내 리그에서 인종의 벽이 허물어지자 세계 무대에서 브라질 축구팀이 선전하게 되고 브라질 축구의 위상도 빠르게 높아진다. 그리고 마침내 펠레라는 축구 영웅의 등장과 함께 스웨덴 월드컵에서 첫 우승컵을 안음으로써 브라질 축구는 과거와 완전히 결별하고 새로운 영광의 역사를 시작한다.

펠레. 우리에게 펠레는 ‘축구 황제’로 기억된다. 또한 그는 월드컵 때마다 거의 매번 우승팀 맞추기에 실패하는 ‘헛다리 전문가’로도 알려져 있다. 그러나 현역 선수에서 은퇴한 후 펠레가 체육부 장관직에 오르고 브라질 축구 개혁을 위해 훨씬 더 어려운 싸움을 벌였던 이력은 잘 모를 것이다.

브라질 축구의 주인공은 스타플레이어지만, 지배자는 권력자들이다. 축구협회와 지역 명문 클럽, 재계와 정치권까지 아우르며 돈과 권력, 이권이 얽히고설킨 브라질 축구계는 오랫동안 부정부패의 복마전으로 악명이 높았다. 펠레 자신도 오랜 기간 같은 생태계의 일원이었으면서 개혁을 추진한다는 게 얼마나 힘든 싸움이었을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싸움의 결과는? 브라질 축구계 개혁은 여전히 진행형이라는 말로 답을 대신한다.

한편 브라질에서 요즘 한국과 관련해 가장 ‘핫’한 대화 소재는 넷플릭스 한국 드라마다. K드라마·K팝 등 한류가 베스트셀러라면, 브라질 지식층에게 꾸준히 인기 있는 스테디셀러도 있다. ICT, 반도체 같은 한국 첨단기술 기업과 교육이다. 특히 한국에 관심이 많은 주요 기업인이나 정부 관계자일수록 기대 이상의 관심과 찬사를 표현하는 분야가 교육, 그중에서도 급속한 경제성장과 중산층 확대를 이끌었다는 평가를 받는, ‘산업화·경제성장 과정에서의 공교육’이다.

브라질엔 외국인 대상 국제학교가 따로 없다. 우리 기업 주재원 대부분은 자녀를 현지인 대상 영어 사립학교에 보낸다. 연간 학비는 1만~3만 달러 수준이다. 현지 중산층 이상 가정은 자녀를 유아원·유치원부터 초중고까지 대부분 사립학교에 보낸다. 브라질에선 사립과 공립 학교 간 교육 격차가 매우 크다. 반면 대학 과정은 우수한 교수진, 무료 학비 등 국공립대의 여건이 좋다. 문제는 사립에 비해 수준이 크게 낮은 공립 초중고를 거쳐 우수한 성적으로 명문 국공립대에 입학하기가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브라질 공립학교의 수준이 떨어지는 것은 급여 등 처우 격차에 따른 교사 수준 차이 때문이다. 우리는 유교적 전통에 따라 교사에 대한 사회적 대우가 높았던 배경도 있지만, 해방 이전부터 사범학교를 통해 우수 교사를 배출했고 건국 이후 산업화와 경제성장 과정에서도 꾸준히 사범대학과 교육대학에서 우수 교원을 공립 초중고에 공급했다. 서울과 지방 간, 도농 간 교육 여건 차이는 있었지만, 공립과 사립 간에는 구분이 무의미할 만큼 교육 수준, 교육비, 교직원 급여 등 처우에서 차이가 거의 없었다. 대한민국만큼 건국 초기부터 국가 경제력에 비해 공교육 수준이 상향 평준화된 나라는 찾기 어렵다.

상대적으로 우수한 공립학교 수준만으로 모든 설명이 가능할까? ‘소뼈로 쌓은 탑’이란 뜻의 ‘우골탑’은 농사짓는 시골에서 가장 큰 재산인 소를 팔아 자식을 진학시킨 대학을 일컫는 말이다. 실제 소와 논밭을 팔아 자식 교육에 자산 대부분을 투자한 부모가 많았다. 게다가 이들 부모는 조상들로부터 경작지를 물려받은 지주가 아니었다. 건국 초기부터 시작된 농지개혁으로 자작농이 급속히 늘어났는데, 이것이 사회·경제 개혁 이상으로 다수 국민이 절대빈곤에서 탈피하고 ‘공교육에 진입할 수 있는 기회’, 즉 기초 경제력을 제공했다.

근대화·산업화 과정에서 우골탑이라는 말이 생길 정도로 가산 대부분을 자녀 교육에 올인할 수 있는 헌신과 교육열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모든 계층이 가장 쉽게, 빨리, 차별 없이 ‘출세하는 방법’이 교육을 통한 성공, 한마디로 ‘공부 잘하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구체적으로 대한민국에 ‘입시, 고시, 공채’가 존재했기 때문이다. 과거 ‘독재자’라고까지 불리던 최고 권력자도 자녀 입시 순위에 영향을 줄 수 없었던 반면 가난하고 ‘빽’ 없는 출신이라도 고시를 통해 고위 관료로의 빠른 신분 상승이 가능했다. 교육열, 교육 투자의 대가가 빈부와 상관없이 공정하고 명확하게 주어졌다.

투자 대가가 공정하게 주어진 경제성장기의 한국 교육, 경쟁과 실력 중심의 브라질 축구와 닮은꼴

브라질 유명 축구 선수들은 빈민층 출신이 많다. 적어도 브라질 축구에선 개천에서 용 나는 게 특별한 일이 아니다. 거의 모든 분야에서 성공의 조건은 재능과 열정(노력), 운이다. 이 중 개인이 통제할 수 있는 것은 열정뿐이다. 많은 브라질 빈민촌 소년이 축구공에 열정을 쏟아붓는다. 어린 펠레가 코코넛을 차던 해변에서, 빈민촌 좁은 골목 돌길, 진흙 길에서 맨발로 몸을 엉켜 공을 다툰다. 축구가 가장 재미있고 빨리 성공할 수 있는 희망이기 때문이다. (재미엔 자신이 없지만) ‘성공의 희망’이란 점에서 브라질 축구는 경제성장기의 한국 교육과 닮았다. 희망이 있는 곳에 노력이 있고 성공이 있다.

세계 많은 청년이 어둠 속 돌길, 진흙 길을 힘들게 밟으면서도 별을 보고 따라 걷는다. 사람마다 바라보는 별이 공부일 수도, 축구일 수도 있고, 창업·취업·예술일 수도 있다. 가는 길을 매끈하게 포장하는 일도 중요하지만, 미래 세대에게 희망의 별을 밝혀 주는 게 기성세대와 국가의 가장 큰 역할, 책임이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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