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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고플때, 힐링푸드
피낭시에보다 약과
이해림 푸드 칼럼니스트, 『탐식생활』 저자, 콘텐츠 에이전시 ‘포르테’ 대표 2022년 06월호


무엇인가를 간절히 원해 본 것이 실로 오랜만이었다. 기회는 단 1초. 그 한 번에 성공하기를 바랐다. 오후 2시가 되기 10분 전, 로그인 등 준비를 마쳤다. 마우스 배터리도 90% 이상 충전돼 있었고, 블루투스 키보드도 문제없이 잘 눌렸다. 튀어나올 것처럼 두근거리는 심장만이 사소한 문제였다.

결과는 실패. 누군가가 최선을 다하면 후회는 없다고 했던가.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던 것 같다. 최선을 다했기에 더 억울하고 서운했다. 스스로에 대한 실망감이 생겼다. 나 자신은 최선을 다해 봐야 성공하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좌절감이 밀려왔다. 

나는 ‘2022 경복궁 별빛야행’ 예약에 실패했다.

궁에서 펼쳐지는 한과의 향연

‘경복궁 별빛야행’은 쉽게 말해 경복궁 궐내를 야간에 투어하는 프로그램이다. 평소에는 볼 수 없는 경복궁 북측의 미공개 구역이 코스에 포함돼 있고, 물론 해설과 함께 밤이 내려앉은 경복궁을 한 바퀴 산책하는 프로그램이다.

코스 중 (내게) 핵심은 궁궐의 부엌인 ‘소주방’이다. 조선 왕의 일상식인 12첩 반상 도시락을 현대적으로 합에 조금씩 담아낸 ‘도슭수라상’이 제공된다. 도슭이 도시락, 수라상이 바로 그 수라상이다. 밥으로 끝나는 거였다면 이토록 슬프지 않았다. 임금님처럼 수라상을 받는 동안 소주방 마당에서 무려 국악 공연이 펼쳐진다. 단청을 따라 밤하늘이 펼쳐지고 온화한 공기 가득 한복을 차려입은 악사들의 풍악이 울려 퍼지는 가운데 궁궐의 한가운데서 수라상을 냠냠 먹는 것이다. 상상만 해도 황홀하고 인상적이지 않은가. 그걸 실패했다니. 사진만 봐도 심장이 쿵쾅대고 피눈물이 날 것만 같다.

사실 처음 실패해 본 것도 아니다. 경복궁 생과방 예약도 실패했고, 한국의집 고호재 예약도 실패했다. 경복궁 생과방은 소주방 전각에 위치한 곳으로 왕과 왕비의 후식과 별식을 담당하던 주방이다. ‘생물방’이라고도 불렸는데 현재는 일반 관람객에게 『조선왕조실록』을 고증한 궁중병과와 궁중약차를 제공하는 유료 프로그램이 운영되고 있다. 정해진 일정대로 티켓을 예매해 참여할 수 있는데, 나는 이것도 예매에 실패한 것이다. 생과방에선 구선왕도고(아홉 가지 한방 약재를 이용한 떡), 주악, 사과정과, 약과, 호두정과, 매작과 그리고 여섯 가지 차를 취향대로 선택할 수 있다. 여섯 차 중 감국다는 국화와 구기자로 만든 차인데, 번뇌가 있거나 화가 날 때 마음을 가라앉히는 목적으로 냈던 차라고 한다. 이렇게 ‘피케팅’ 실패만 하는 내게 꼭 필요한 차였던 것 같다.

한국의집의 궁중다과 고호재는 궁궐만큼의 박력은 없지만 유사한 다과 체험 프로그램으로, 서울 충무로 한국의집 별채인 문향루에서 다과상을 즐길 수 있다. 별도로 한정식을 즐기는 프로그램도 있다. 문향루 다과상은 올봄에는 매화차와 쑥구리단자, 만두과, 화전, 당귀엽전, 금귤정과, 딸기정과, 호두강정, 씨앗오자죽 등을 소반 차림으로 맛볼 수 있다. 

 

이렇게 실패만 해서는 아무것도 먹을 수 없다. 공공에서 안 되면 민영에서 먹으면 된다. 마침 요 몇 해 사이 한식 디저트 또한 거센 인기 열풍이라 곳곳에 즐길 만한 곳들이 성업 중이다. 서울 서래마을의 ‘김씨부인’으로 서둘러 갔다. 일반 카페와 좀 다른 게 있다면 온통 한국적인 디테일로 공간이 꾸며져 있다는 점이다. 예약 전쟁에 참전하지 않는 대신 가격대는 높은 편이었지만, 소반 차림 안에 계절을 담은 다양한 한과를 구성해 만족스럽게 즐길 수 있었다. 물론 풍악과 단청이 빠졌기에 아쉬움은 남았지만, 현대적인 한식 디저트 전문점다운 면모를 경험할 수 있었다.

아쉬움을 달래기 위해 또 한 곳을 한달음에 방문했다. 서울 성북동의 ‘동병상련’이다. 2004년에 국가중요무형문화재 제38호 조선왕조 궁중음식 기능 이수자로 지정된 박경미 씨가 운영하는 카페다. 다른 어느 곳보다도 다채로운 종류의 한과와 떡 하나하나를 한국적 미감의 단아한 소포장으로 취향껏 골라 먹을 수 있다. 선택한 한과와 떡은 다소곳하게 상차림을 해줘 사뭇 품위 있다. 내가 갔던 때는 석가탄신일을 앞둔 청아한 날이라, 이웃한 길상사까지 색색 연등이 찰랑이고 실내에서 하나의 공간인 것처럼 연결돼 뻗은 초록 가득한 테라스 정원엔 봄빛이 가득 쏟아져 한옥 단청 못지않은 정취를 빚어내고 있었다. 

이번에는 궁궐의 한때를 기대하다 실패한 상처를 극복하기 위해 느긋하게 앉아서 즐길 수 있는 곳을 찾아갔지만, 내가 좋아하고 평소 즐기는 한과는 따로 있다. 서울 청담동의 ‘합’이다. 그중에서도 주악. 이북 개성지방에서 유래한 한과인데, 찹쌀 반죽을 기름에 잔잔히 튀기고 느긋하게 조청을 먹여 만든다. 설명만 들어서는 아무런 대단한 맛이 아닐 것 같은데 막상 입에 넣어보면 충격적으로 맛이 좋기에 하나만 먹어선 끝낼 수가 없는 한과다. 바삭하게 굳은 겉을 한 입 물면 드러나는 찹쌀의 포근하고 나긋나긋한 질감, 씹을 때마다 혀 아래로 배어드는 가볍고 촉촉한 조청의 단맛, 그리고 합의 경우 살짝 생강 향을 내는데 그 절묘한 균형을 자꾸만 맛보고 싶어 ‘주악 병’이 날 때마다 꼭 합의 주악을 찾곤 한다. 하루에 만드는 양이 정해져 있어 느즈막히 가면 허탕을 치기도 하는 인기 품목이다.

한식 디저트 붐, 애국심을 다시 보게 하다

한과나 떡이 피낭시에와 크루아상만큼 멋있는 디저트가 됐다. “나 사실 약과 좋아해”라고 말할 때, 뭔가 창피한 기분이어야 했던 것이 불과 몇 해 전이다. 약과를 돈 주고 사 먹는 취향은 어딘가 촌스럽고 구식인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비단 약과뿐 아니라 모든 떡과 한과가 그랬고, 한복이 그랬고, 국악이 그랬고, 한옥이 다 그랬다.

언제부턴가 공기가 달라졌다. 한옥 스테이나 한옥 스타일의 주택이 세련된 것이 되고, 디자이너 정구호 씨가 연출한 국립무용단의 한국 무용 공연 <향연>이 전설이 되고, 한복을 빌려 입고 고궁을 산책하며 찍은 사진을 SNS에 자랑하는 것이 ‘인싸’의 일이 됐다. 의정부 장인한과의 ‘파지 약과’(제조 중 부서진 약과)는 슬금슬금 입소문을 타더니 이제는 구할 수도 없는 것이 됐고, 누군가 파지 약과를 자랑스레 한 팩 선물했을 때 “이게 파는 물건이라고?” 하고 무심결에 뱉은 나의 무의식은 몇 해째 놀림거리 망언이 돼버렸다. (부서진 약과가 더 맛있다.) 

서울 시내 궁궐과 한국의집에서 운영하는 식사나 다과 체험 코스는 상술했다시피 나 같은 사람은 엄두도 못 내는 ‘BTS급’ 피케팅이 됐고, 먹을 것 하나 없어도 궁궐 탐방 코스는 개방할 때마다 예약 전쟁이 벌어진다. 그중에서도 궁궐 야간 개장 인증샷은 SNS에서 특급 포스팅 분류에 속해 이례적으로 많은 ‘좋아요’를 받곤 한다. ‘애국심’이라는 말이 낡은 교과서로 주입 당했던 흑역사가 되고, ‘국뽕’이라는 비하어까지 나왔던 세상에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이 의문에 대해 지인이 내놓은 답은 무척 충격적이었고, 주변을 돌아보며 차차 스스로 납득해 가는 중이다.

“요즘 애들은 선진국에 태어났잖아. 후진국에서 태어난 장년·노년 세대나, 개도국에서 태어난 우리와는 살아온 국가 자체가 다른 거야. MZ세대에게는 태어나자마자 인식한 내 나라가 이미 선진국이고, 자랑스러운 나라인 거야. 다른 잘사는 나라에 대한 사대주의는커녕 동경도 없어. 한국적인 것이 멋지고 세련된 것이래.”

약과를 좋아하는 취향을 양말에 난 구멍처럼 창피하게 여겼던 나는, 그리고 절반가량의 한국인들은 마음에 없이 달달 외워야 했던 ‘애국심’을 다시 처음부터 배워야 할는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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