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의 이름으로 나를 불러줘, 나의 이름으로 너를 불러줄게!”라는 간질간질한 대사를 남긴 이 영화는 초여름 사춘기 소년의 첫사랑 이야기다. 숨 막히게 설레고 눈부시게 아름답고 가슴 깊은 곳을 찔린 것처럼 슬픈 영화다. 영화가 끝난 후 가만히 눈을 감았다. 나는 어느새 1980년 6월로 가 있었고, 소나기를 맞으며 나의 첫사랑 소녀의 모습을 한번 보기 위해 그의 집 근처를 맴돌고 있었다. 그 장면은 몇 년 후 그에게 마지막 이별 편지를 받고, 계단에 앉아 소주를 마시며 우는 나의 지질한 모습으로 이어졌다.
아름다운 첫사랑 이야기와 내 첫사랑의 추억으로 가슴이 먹먹한데 아까부터 속이 계속 울렁거린다. 뭔가 잘못 먹은 걸까? 너무 긴장하고 감정적으로 몰입해서 체한 것일까? 아니었다. 내가 느끼는 위장으로부터의 느낌은 역겨움이었다. 혐오스러운 무언가를 보거나 느꼈을 때 나타나는 반응이었다. 맞아, 이 영화가 동성애 이야기였지?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은 동성애 영화라 처음에는 좀 내키지 않았지만 좋은 영화라고 추천하는 이야기를 많이 들어서 용기를 내서 보게 됐다. 처음에는 불편했지만 섬세한 감정 표현과 멋진 영상미에 빠져들어 동성 간의 사랑이란 것을 잊고 그냥 사랑하는 두 사람의 이야기로 받아들였다. 나는 성소수자들을 혐오하지 않고, 그들을 존중하며, 그들의 권익과 심적 안정을 위해 정신과 의사로서 할 수 있는 일들을 거부하지 않고 적극적으로 하는 사람이다. 그런데 내 몸은 내 마음과 달랐다. 혐오 반응을 보이며 위험에서 벗어나라는 신호를 보내고 있었다. 내 몸은 내 마음처럼 진보적이지 않다.
역겨움 혹은 혐오감은 질병을 예방하기 위한 방어적 ‘행동 면역체계’의 가장 중요한 방어기전이다. 더러운 물건이나 사람, 배설물, 상한 음식, 부자연스러운 행동 등을 볼 때 우리는 역겨움을 느낀다. 곁에 있거나 먹었다가는 질병에 옮을 수 있으니 빨리 피하거나 먹지 말라는 신호다. 많은 질병이 성관계를 통해 전염된다. 그래서 전통적이지 않은 성관계나 배우자가 아닌 상대와의 위험한 성행위에 대해서도 혐오감을 느끼게 된다. 외국인에 대한 혐오감도 안전유지를 위한 신체적 반응이다.
‘행동 면역체계’는 종종 감염 위험성이 없는 대상에 대해서도 활성화되곤 한다. 과잉 작동되는 것이다. 그 이유는 ‘거짓 음성(false negative)’보다 ‘거짓 양성(false positive)’의 오류를 범하는 쪽이 안전하기 때문이다. 위험한 상황을 위험하지 않다고 잘못 판단하는 것보다, 위험하지 않은 상황을 위험하다고 판단하는 것이 손해가 더 적은 것이다. 생소하거나 위험한 것과 비슷한 무언가와 조우하면 우선 조심하고 피하는 쪽이 안전하다고 몸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그래서 성소수자나 외국인에 대한 혐오가 정당하다는 것은 아니다. 나에게 위험이나 불편을 초래하지 않는 사람들을 단지 나와 다르다고 혹은 내 신념과 일치하지 않는다고 거부하고 배제하거나 혐오하는 것이 옳을 수는 없다. 위급 상황이 아니라면 위험한지 아닌지를 잘 파악해야 한다. 그러려면 관심을 갖고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혐오가 널뛰는 대한민국에는 ‘거짓 양성’에 격한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너무 많다.
‘양성’인지 ‘거짓 양성’인지 구분하려는 노력만이 공동체를 살릴 수 있다. 나와 다른 타인의 차이를 인정하고, 능동적으로 그 차이에 대해서 이해하려는 관심과, 그 차이가 나에게 해가 되지 않기에 너그러운 마음으로 공존하게 하는 관용을 가져야 혐오에 감염되지 않을 수 있다. 상대방을 서로 의지하고 함께 힘을 합쳐 살아가야 할 소중한 사람으로 존중하는 마음을 가질 수 있다면 정말 성숙하고 현명한 사람이 될 것이다.
몸은 조심하라는 혐오의 위험 신호를 보내지만, 정신을 차리고 잘 살펴보면 사랑 이야기다. 마음이 몸에게 안전하다고 진정시키면서 봐야 하는 영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