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0년대 이후 인터넷 세상이 열리면서 본격화된 흐름들 중 하나가 있다. 바로 ‘언어의 홍수’가 발생했다는 거다. 과연 그렇다. 어디를 둘러봐도 ‘말’이 차고 넘친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 속에서 말로 주목받을 수 있는 방법은 어디에 있을까. 해결책은 간단하다. ‘자극’을 지향하면 된다. 옐로 저널리즘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고 있는 소셜 미디어를 떠올려보면 이게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어딜 봐도 자극, 그저 자극뿐이다.
오직 감탄사만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현상도 같은 데서 기원한다. 어딜 둘러봐도 “꿀잼!”, “핵잼!” 같은 최상급 표현만이 자리를 허락받는다. 당연하다. 최상급에 느낌표까지 붙이질 않으면 그 누구도 주목하지 않기 때문이다. 나는 이걸 ‘언어 인플레이션’이라고 부르는데 또 다른 현상이 하나 더 있다. 예를 들어 음악인이 조금만 잘해도 곧장 ‘천재’ 소리를 듣는다는 거다. 인기를 조금만 얻어도 ‘국민가수’ 호칭이 따라붙는다.
결론부터 말해 본다. 대한민국 역사상 국민가수 호칭을 부여받을 수 있는 존재는 그렇게 많지 않다. 기껏해야 5명은 될까. 아니, 그렇지 않나. 국민가수다. 전 국민이 그의 존재를 알고, 어느 정도 음악을 꿰고 있어야 겨우 획득할 수 있는 영광의 배지다. 딱 하나만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다. 이 가수는 누가 뭐래도 국민가수가 맞는다는 거다. 그렇다. 이번 달의 주인공, ‘조용필’이다.
그는 등장부터 국민가수였다. 모두가 ‘돌아와요 부산항에’를 따라 불렀고, 이 전통은 지금까지도 야구장에서, 노래방에서 이어지고 있다. 1980년대가 되면서 조용필은 모두가 인정하는 가요계의 원톱이 됐다. 이와 관련 나와 함께 일하는 DJ 배철수의 증언은 의미심장하다. “어차피 저 형(조용필)이 1위는 다 할 거니까 우리는 2위라도 해보자!” 저 위대한 송골매마저도 한 수 접고 들어간 존재, 그가 바로 조용필이었다.
1980년대에 그는 장르적으로도 국민가수였다. 안 다뤄본 장르가 없었다. 디스코, 팝, 록, 프로그레시브 록, 트로트, 심지어 민요도 다뤘다. 가요 역사상 조용필 이상의 올라운드 플레이어는 없었다고 봐도 무방할 수준이다. 히트곡을 세자면 정말이지 끝도 없다. 그중 내가 좋아하는 곡만 꼽아도 ‘고추잠자리’, ‘허공’, ‘자존심’, ‘바람의 노래’, ‘비련’ 등등. 지면이 모자라 차마 적지 못하는 노래들에 미안해질 수준이다.
그에게 부침이 없었던 건 아니다. 특히 1990년대 후반부터 2010년 정도까지는 히트곡이 나오질 않았다. 그럼에도 이 시기를 하락세였다고 정리할 순 없다. 일찌감치 공연시장의 가능성을 파악한 그는 1990년대부터 공연에 매진하면서 자신만의 브랜드를 창조했다. 지금도 조용필 콘서트는 그 물량이나 완성도 면에서 봤을 때 국내 최고 수준으로 꼽힌다.
심지어 그는 2013년 신보 와 함께 다시금 히트곡을 견인하면서 정상으로 치달았다. 지금도 기억이 생생하다. 아이에서부터 노년층에 이르기까지, 모두가 수록곡 ‘Bounce’를 흥얼거렸다. 보통 2000년대 이후는 세대 별로 향유하는 음악이 극단적으로 갈린 시기로 분류된다. 그런 와중 전 세대가 인지하는 곡을 쓰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고 봐야 할 텐데 이걸 해낸 가수가 조용필이다. 과연, 국민가수다.
지난 2018년은 그에게 특별한 해였다. 데뷔 50주년을 맞이한 것이다. 다음처럼 상상해 본다. 데뷔 후50년이 지난 뒤에도 공연장을 꽉 채울 수 있는 가수가 과연 앞으로 나올 수 있을까. 글쎄. 말처럼 쉽지는 않을 게 분명하다.
나는 지금까지 조용필의 공연을 총 2번 봤다. 앞으로 얼마나 더 그가 공연을 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다. 꼭 강조하고 싶다. 만약 당신이 아직까지도 조용필의 라이브를 경험하지 못했다면 부디 꼭 시간을 내서 가보기를 바란다. “내가 이렇게 조용필 노래를 많이 알고 있었나?” 놀라는 자신을 발견하게 될 테니까. 과연, 괜히 국민가수가 아니구나 싶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