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은 항상 부족한 것 같다. 그렇다고 밑바닥이 드러나도록 고갈되거나 턱없이 부족한 것은 아니다. 기껏해야 2% 부족하다.
그런데 그 2%가 사람을 우울하게 하고, 병들게 하며, 끝없이 자존감을 낮추기도 한다. 부족한 2%는 누구에게나 힐링이 필요한 이유가 된다.
자연은 힐링이 필요할 때마다 챙겨 먹는 상비약과 같다. 자연은 소리 없이, 변함없이 마음과 생각을 치유해 준다.
그 맛을 알기에 지금 강릉으로 떠난다.
탁 트인 바다와 호젓한 솔숲길
경포대해변은 부산 해운대해변과 더불어 우리나라 해변의 양대 산맥과 같아서 여름철 젊음의 열기로 후끈하다. 탁 트인 동해를 가슴에 한껏 담거나, 백사장과 솔숲을 따라 산책을 즐겨도 좋다. 해변을 따라 걷다 보면 자연스럽게 1km 남짓 떨어진 경포대를 찾게 된다. 고려 말 안축의 ‘관동별곡’에 처음 소개된 경포대는 이후 조선 가사 문학을 대표하는 송강 정철의 ‘관동별곡’에도 등장하면서 핫플에 등극한다. 경포대 누각 안에 수많은 편액이 걸린 것도 그 같은 이유에서다. 누마루에 오르면 경포호가 한눈에 들어와 가슴 깊은 곳까지 탁 트인다. 경포호 수면을 휘감고 불어오는 바람은 더할 나위 없이 시원하다.
경포호와 가까운 곳에 『홍길동전』의 저자 허균의 누이인 허난설헌의 생가가 복원돼 있다. 80년 이상 된 고목과 어우러진 전형적인 사대부 가옥의 운치가 깊고 아늑하며 고요하다. 경포대해변에도 솔숲길이 있지만, 이곳은 더 호젓해 솔숲의 정취를 고스란히 느낄 수 있다. 나뭇가지를 비집고 내리쬐는 햇빛 한 줌이 예쁘고, 바람에 흔들리는 솔잎의 춤과 산새의 흥겨운 노래가 눈과 귀를 즐겁게 한다. 무심코 지나치기엔 그 향과 소리가 어찌나 남다른지 걸음이 한없이 느려진다. 솔숲에서 유유자적했다면 허난설헌 기념관에 들러보자. 조선시대 최고의 여류 문인이지만 비운의 삶을 살다 간 그녀의 문학 작품이 전시돼 있다.
조선 풍류객의 버킷리스트, 선교장
선교장의 풍경은 한 폭의 산수화를 보는 듯하다. 선교장은 효령대군(세종대왕의 형)의 11대손에 의해 처음 지어져 무려 10대에 이르도록 증축과 보수를 해온 끝에 오늘날의 모습을 갖췄다. 햇수로 따지면 300여 년의 세월이다. 선교장이라는 이름은 이 가옥이 위치한 곳이 배다리마을(선교리)이어서다. 처음 지어졌을 당시 선교장에서 배를 타고 경포호까지 건너다녔다고 한다. 그만큼 경포호가 넓었던 게다.
선교장에서는 오감이 모두 즐겁다. 은은한 가야금 소리, 눈이 편안한 신록과 그윽한 솔향, 손때 묻은 오래된 나무에서 느껴지는 반질반질한 질감, 정성껏 준비한 음식이 있어서다. 그 옛날 풍류를 즐겼던 선비들이 선교장을 방문하는 게 그들만의 버킷리스트였다고 하니, 충분히 이해하겠다.
선교장은 족제비를 쫓다가 발견한 터에 집을 지었다는 이야기로 유명하다. 그만큼 명당이라는 뜻인데, 활래정을 보면 이구동성으로 무릎을 ‘탁’ 치게 된다. 활래정은 선교장 초입에 있는 인공 연못에 세워진 누각 형식의 정자다. 여름에는 연못에 연꽃이 만개해 활래정에 있으면 마치 신선이 된 듯한 착각에 빠진다.
솟을대문을 지나면 볼 수 있는 줄행랑과 사랑채 열화당도 선교장의 품격을 한층 높여준다. 열화당의 차양은 선교장에 초대받았던 러시아 공사가 선물한 것으로, 값비싼 구리소재여서 눈길을 끈다. 안채와 연결된 문 아래쪽은 문지방으로 막히지 않고 트여 있다. 이 집터를 안내해 준 족제비가 자유롭게 드나들 수 있도록 배려한 것이다.
안채에서 집 뒤쪽으로 가면 초가로 지은 초정이 있다. 선교장에서 가장 높은 곳이어서 이곳에서 보는 풍광이 일색이다. 내친김에 발걸음을 숲길로 향한다. 아름드리 소나무가 숲길을 따라 이어져 산책하는 재미가 쏠쏠하다.
울창한 숲속 그늘에서 짙은 솔향에 취하다
강릉에는 소나무가 유난히 많다. 주로 바닷바람을 막는 방풍림 목적으로 소나무를 심은 까닭에 해안가에 집중돼 있긴 하지만, 내륙에도 소나무가 많다. 강릉솔향수목원도 그중 한 곳이다.
2013년 10월에 문을 연 강릉솔향수목원은 강릉시 구정면의 칠봉산(360.8m)과 매봉산(820.7m)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수목원의 자랑거리는 7만9천m2(약 24만 평) 부지에 빽빽하게 자란 금강소나무다. 금강소나무는 강원도와 경상북도 지역의 산비탈과 능선에 주로 자생한다. 일반 소나무와 비교해 줄기가 굽지 않고 곧게 자라며 마디가 길어 위엄이 있어 보인다.
이맘때 이곳이 좋은 이유는 유명 관광지보다 찾는 이가 적어 호젓하고, 울창한 숲속 그늘과 시원한 냇물이 있어서다. 수목원에는 모두 23개의 테마가 있는데 계절의 변화를 보고 즐길 수 있도록 비비추원, 수국원, 암석원, 약용식물원, 원추리원 등으로 조성돼 있다. 그중 자생 수종인 금강소나무가 울창한 ‘천년 숨결 치유의 길’이 수목원에서 백미로 손꼽히는 코스다. 코스 중에 있는 숲체험학습원은 어린이들의 자연학습체험장으로 활용 중이다.
학습원을 지나면 나무데크길이 이어진다. 경사가 완만하고 걷기에 편해 걸음이 불편한 사람도 보호자와 함께라면 숲을 체험할 수 있다. 데크길 양옆에는 금강소나무가 빽빽하게 심겨 서로 키 자랑을 하듯 하늘로 곧게 뻗었다. 금강소나무의 곧고 굵은 기둥에서 붉은빛이 은은하게 감돌아 소나무의 제왕이라는 명성에 걸맞은 포스가 느껴진다. 또 하늘로 올라갈수록 녹음이 짙고 무성해 넉넉한 품을 자랑한다. 청록빛 잎사귀에서 내뿜는 짙은 솔향이 산책길을 가득 채운다.
수목원을 조성할 때 인위적으로 심거나 옮긴 금강소나무가 단 한 그루도 없다고 한다. 자연의 모습을 해치지 않기 위해서였다. 그래서인지 산책길은 소나무 앞을 가로지르는 법이 없이 에둘러 나 있다. 설령 길 앞에 나무가 있어도 베거나 옮기지 않는다. 길이 나무를 품어버린다. 그 덕분에 데크길은 인위적이지 않고 자연과 하나가 되며 그 길을 걷는 사람도 자연이 된다. 자연이 선사하는 힐링을 맛보며 걷다 보면 이내 솔향전망대에 도착한다. 전망대에 오르면 밑에서는 절대 볼 수 없던 금강소나무의 머리끝을 볼 수 있다.
전망대에서 내려오자 작은 시내가 마중한다. 힘들게 걸어온 발에게 포상이라도 하듯 탁족을 즐긴다. 맑디맑은 시냇물에 발을 담그자 여행의 피로가 한순간에 사라지고 몸은 다시 재충전된다. 가벼워진 몸은 이내 하늘정원에 닿는다. 해발 261m에 자리한 하늘정원은 수목원에서 전망이 가장 좋다. 화창한 날엔 동해까지 아득하게 보인다고 한다. 하늘정원에서 내려가는 길은 이전과 사뭇 다르다. 이전 길이 울창한 나무가 키 자랑을 하듯 이어지는 경쟁의 연속이었다면 내려가는 길은 아기자기한 정원과 예쁜 꽃길이 이어진다. 그래서 마음에 부담도 없고 힘들지도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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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바다를 바라보며 마시는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 생각만으로도 시원하고 낭만적이다. 강릉에는 바다를 마주하고 커피를 즐길 곳이 많다. 가장 핫한 곳은 역시 안목해변이다. 30여 곳에 이르는 카페가 저마다 독특한 분위기와 맛으로 손님을 맞이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