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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준비하는 사람에게 열리는 풍성한 세계
김혼비 에세이스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아무튼, 술』, 『다정소감』 저자 2022년 06월호


4월부터 코로나19 신규 확진자 숫자가 완연한 감소세를 이어가고, 잇따라 방역 규제가 해제되면서 여름휴가철 여행 열풍의 조짐이 곳곳에서 보인다. 항공사와 여행사들이 경쟁적으로 여행 프로모션 상품들을 내어놓고 있고, 일부 인기 지역 상품들은 내어놓는 족족 완판 행진을 이어가고 있으며, 당장 내 주변에도 이미 발 빠르게 해외여행을 떠난 사람이 몇 명 있다. 주변이 들썩이는 만큼 내 안에서도 2년 넘게 참고 참은 여행욕이 수시로 꿈틀대지만, 아직은 코로나19가 그렇게 호락호락 바다를 건너는 여행을 허락해 줄 거라고는 도무지 믿기지 않기에 괜히 크게 기대했다가 크게 실망할까봐 애써 외면 중이다. 대신 그동안 늘 그래왔던 것처럼 다소 묵묵하게 나름의 방식대로 여행준비‘만’을 하고 있다. 팬데믹 기간에 새로 갖게 된 꽤나 즐거운 취미로, 이는 전적으로 책 『여행준비의 기술』 덕이다.
 
책의 서문에서부터 박재영 작가는 본인의 취미가 ‘여행’이 아니라 ‘여행준비’라고 명확히 선을 긋고 시작하는데, ‘그런 게 취미가 될 수 있다고?’라는 의혹을 품었던 사람도 책을 읽다 보면, ‘여행준비’라는 행위가 ‘여행’ 그 자체보다도 훨씬 우리 삶에 맞닿아 있는 취미라는 것을, 여행을 준비하는 과정이야말로 삶을 가장 객관적인 방식으로 면밀히 들여다보는 과정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는 탁월한 책이다. 그가 풍부한 일화들을 맛깔나게 풀어내며 꼽은 여행준비의 여러 장점 중 가장 마음에 와닿은 것은 “내가 누구인지를 정확히 알 수 있게 해준다”는 점이었다. 

정말 그렇다. 여행준비는 매 순간이 선택과 포기의 연속이다. 가고 싶은 곳, 하고 싶은 일, 먹고 싶은 음식, 사고 싶은 물건은 무수히 많지만 한정된 예산, 한정된 시간, 한정된 체력(그리고 한정된 위장의 크기) 안에서 모든 것을 다 할 수는 없으니 가장 중요한 것부터 눈물을 머금고 포기해야 하는 것들을 계속 골라내야 한다. 여행지에서 한번 지나간 시간은 쉽게 다시 오지 않으니 한순간도 허투루 쓸 수 없다(물론 허투루 시간을 쓰기 위해 떠나는 여행도 있지만 그 허투루조차도 허투루 정할 수 없다). 여행계획을 짤 때만큼 ‘내가 정말로 원하는 것’에 대해 고도의 집중력을 갖고 고민의 고민을 거듭하는 순간이 또 있을까? 그래서 여행준비를 진지하게 계속하다 보면 내가 뭘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어디에서 보람을 느끼고 어디에서 실망하는지, 어떤 순간에 큰 행복을 느끼고 어떤 순간을 가장 두려워하는지를 확인하게 되고, 그러다 보면 결국 내 가치관이 무엇이고 내 삶의 우선순위는 무엇인지까지 깨닫게 되는 것이다.

여행의 기회는 제한적이다. 쓸 수 있는 카드의 숫자가 정해져 있다. 그러니 현명하게 잘 써야 한다. 기대에 못 미치는 여행은 그 자체로도 나쁘지만 훨씬 더 좋은 여행의 기회를 날려버린다는 점이 더 나쁘다. -p.63

그 밖에도 이 책에는 “여행을 평소와 얼마나 다르게 꾸밀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런 섬세함이라니!), 평소 구글 지도에 별을 찍어 여행을 준비하는 즐거움, 여행 중 방문한 식당을 고르는 노하우와 얽힌 추억들, 운동경기장이나 기업박물관 같은 이색 장소에 방문하는 기쁨, 호기심을 갖고 각 나라의 문화를 관찰한 이야기, 독서로 하는 여행준비, 여행지를 기념하는 아이템 만드는 법 등 유용한 이야기들이 너무나 유쾌한 문체로 가득 펼쳐져 있다. 요즘처럼 여행의 기로에 놓인 시기에 읽기 딱 좋은 책 아닐까. 언제가 되었든 긴 기다림 끝에 올 우리의 다음 여행은 아주 특별하고 애틋할 테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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