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키스탄은 인구 2억3천만 명에 달하는 세계 5위 규모의 시장으로 잠재력이 크다. 그러나 지난해 파키스탄과 한국의 교역 규모는 16억 달러에 그쳤다. 파키스탄은 한국의 44위 수출 대상국으로, 한국은 파키스탄의 22위 수출 대상국으로만 머물러 있다. 코로나19, 글로벌 패권 경쟁 등으로 글로벌 공급망이 과거의 효율성 중심에서 안정성 중심으로 전환하고 있는 상황에서 파키스탄은 안정적인 교역 및 글로벌 공급망 구축을 위한 중국 대체지로서 우리 기업이 향후 전략적으로 관심을 두고 지켜볼 만한 국가다.
대기업 과반이 저기술·저부가가치 산업군에 속해···최근엔 정부의 적극적 투자로 자동차산업 성장 중
양국의 협력관계 증진 방향을 논의하기 위해선 파키스탄의 현재 산업화 상황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파키스탄 재무부는 매년 연간 경제활동 내역을 정리한 「경제연감(Pakistan Economic Survey)」을 발간하고 있다. 2021 회계연도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은 전형적인 개도국 산업구조로 서비스가 전체 GDP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60%를 상회하고, 제조업 비중은 19%대를 유지하고 있다. 또한 서비스를 포함한 수출이 전체 GDP에 기여하는 부분은 10%대에 머물러 있다. 반면 수입의 GDP 기여도는 최근 3년간 17~20%를 기록했다. 1950년대 신생 아시아 독립국 중 빠르게 산업화 전략을 도입한 국가지만, 여전히 전형적인 내수 중심 경제이면서 만성적인 무역적자 구조를 갖고 있다.
이러한 경제구조가 고착된 것은 소비재를 비롯한 전 산업 분야에서 국내 제조업의 발전이 더디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렇다고 파키스탄에 발달된 제조업이 없는 것은 아니다. 파키스탄에도 HS코드 4단위 기준으로 2020년 세계 수출 3위권에 속하는 품목이 13개나 있다. 특히 섬유·의류와 침구류 수출은 세계 2위다. 그러나 세계 3위권 수출제품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조립 단계에 집중된 노동 집약적인 제품이나 원자재를 단순히 가공하기만 하는 저부가가치 품목이 주를 이룬다. 유엔공업개발기구(UNIDO)의 2021년 산업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2018년 기준 파키스탄 산업의 89.7%가 광물가공산업이나 저기술산업에 집중돼 있다.
2020년부터 1년간 코트라는 중소벤처기업연구원, 현대경제연구원과 함께 기획재정부 개도국 지원사업인 지식공유사업(KSP)을 통해 파키스탄 산업의 글로벌 가치사슬 현황을 점검했다. 관련 보고서에 따르면 파키스탄에서 냉장고, 세탁기, 에어컨 등 대부분의 가전제품이 생산되고 있으나 파키스탄 내에서 부가가치가 발생하는 부분은 단순 부품 생산 및 조립에 국한돼 있다. 대부분의 전자부품은 중국에서 수입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러한 산업구조는 가전제품뿐만 아니라, 자동차, 섬유, 식품 등 제조업 전반에 만연해 있다.
파키스탄의 제조업 생산활동에서 가장 큰 부분을 차지하는 것이 대기업들의 활동이다. 파키스탄은 제조기업을 대기업, 소기업, 육류가공(도축)으로 구분한다. 이 중 대기업은 일반적으로 10인 이상을 지속적으로 고용해 생산하고 있는 기업으로 정의하고 있다. 파키스탄 통계청에 따르면 2021 회계연도에 파키스탄의 제조업 생산활동 중 78%는 대기업에서 이뤄졌고, 17%가 10인 미만 소기업에서 발생했다.
2016년 파키스탄 제조업 센서스 기준 대기업으로 등록된 기업은 4만3천여 개다. 이 중 1만3천여 개 기업이 비금속가공산업에, 1만여 개의 기업이 섬유·의류·가죽 산업에, 7,600여 개 기업이 식음료제조업에 등록돼 있다. 파키스탄 대기업의 과반수가 저기술 및 저부가가치 산업군에 속해 있는 것이 파키스탄 제조업의 현실이다.
그러나 최근에는 적극적인 투자로 고부가가치 산업인 자동차산업이 성장하고 있다. 자동차산업은 파키스탄 대기업 생산활동의 7%를 차지하고 있으며, 2021 회계연도에 51.1%라는 가장 높은 생산량 증가를 보인 주요 신산업이다.
파키스탄의 자동차시장은 2018년 이전에는 스즈키를 중심으로 한 일본 브랜드가 독점적 지위를 누려왔다. 일부 소형 모델의 경우 부품 국산화율을 높였으나 사양은 현저히 떨어져 가격 대비 품질이 매우 낮은 제품이 소비자에 제공됐고, 대부분의 모델은 부품 수입률이 높은 편이었다.
그런데 파키스탄 정부가 자동차산업 육성정책(2016~2021년)을 추진하면서 이러한 산업구조에 변화가 일어나기 시작했다. 정부는 2021년까지 총 21개의 그린필드 투자(생산시설 등에 대한 투자)를 승인했고, 파키스탄 현지 대기업 파트너사를 통해 진출한 현대·기아를 포함한 6개 기업이 총 4억7천만 달러 규모의 새로운 생산시설을 완비해 신규 모델을 생산하기 시작했다. 또한 이에 자극을 받은 기존 일본 3사가 수십 년 만에 신규 투자 및 신모델 개발에 나서기도 했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러한 자동차산업 육성정책을 통해 파키스탄 내 자동차 생산능력을 연간 50만 대 이상으로 높여 규모의 경제를 실현함으로써, 부품 국산화율을 제고하고 궁극적으로 엔진 국산화까지 달성한다는 목표다.
파키스탄 정부는 이제 막 성장하기 시작한 전기차산업을 적극 육성하기 위한 다양한 지원책도 발표했다. 50kWh 이하 배터리를 사용한 국내 생산 전기차 판매세율을 17%에서 1%로 낮추고, 전기차 부품 수입관세율을 기존 30%에서 1%로 인하했다. 이를 통해 2030년까지 파키스탄 내에 등록된 자동차의 30%를 전기차로 전환하는 목표를 세우기도 했다.
파키스탄 진출 기업의 정치적·경제적 리스크 완충 위해 자유무역협정·경제협력협정의 조속한 재개 필요
파키스탄 정부는 고용창출, 경제성장 및 국민소득 증대를 위해서 산업화가 중요하다는 점을 잘 인식하고 있다. 코로나19 피해를 줄이기 위해 제조업을 대상으로 전기요금 감면 등의 지원을 했고, 국내 생산활동을 촉진하기 위해 중간재에 부과되는 관세를 대폭 감면 또는 면제하기도 했다. 대표적인 수출 부문인 섬유산업의 경우 산업활동 촉진 및 수출 확대를 위해 중간재 164개 품목의 관세를 철폐하기도 했다.
그러나 노후화된 설비와 현지 부품제조업의 낮은 기술력이 파키스탄의 산업화에 고질적인 걸림돌이 되고 있다. 자동차, 모바일, 가전 등에서 조립생산시설은 증가하고 있지만, 지속 가능한 산업화를 실현하기엔 부품산업의 경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
파키스탄의 부품기업들도 이를 잘 인지하고 있다. 자동차부품 등의 부품협력사들은 성공적인 산업화를 이룬 한국의 기업과 설비개선 및 기술협력 등을 포함한 포괄적인 협력을 원하고 있다. 우리 기업들은 파키스탄이 원하는 기술력과 산업화 경험을 보유하고 있다. 양국 기업 간 파키스탄 제조업 경쟁력 강화를 위한 부품산업 협력이 이뤄질 수 있다면, 글로벌 가치사슬 전환의 실마리를 잘 풀어나갈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파키스탄은 현재 IMF 관리체제에 놓여 있고, 과거에도 수많은 외환위기를 겪었다. 정치적 리스크도 높다. 우리 기업이 파키스탄 진출 시 겪게 될 정치적·경제적 리스크를 줄이기 위해서는 국가 간 제도적인 완충장치를 만들어놓을 필요가 있다. 현재 협상이 중단된 파키스탄과의 자유무역협정 또는 경제협력협정을 조속히 재개해야 할 이유가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