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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차별의 씨앗이웃이 될 수 있으니 혐오하자?
오찬호 『민낯들-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2022년 07월호


“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 구절은 종교 유무와 상관없이 누구나 자주 하고, 또 듣는 말이다. 큰 울림을 지녔기 때문일 거다. 나의 이웃이 있고 그 이웃의 이웃, 또 그 이웃의 이웃 이렇게 따져보면 세상 모든 사람이 연결돼 있다는 짜릿한 결론에 이르지 않는가.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내가 이웃에게 사랑받는 진정한 ‘인류애’가 넘쳐흐른다면 지구촌 어디에서도 성별, 계급, 종교, 인종 등의 이유로 사람이 무시당하는 일은 없을 거다. 그런데 그러한가?

한국 사회에서 이웃은 사랑의 무한 확장이 가능한 철학적 개념이 아니라 ‘나와 너’, ‘우리와 너희’를 철저하게 구분하는 선명한 물리적 경계다. 횡단보도 하나 거리에 임대주택이 들어선다고 대동단결하는 이웃들은 얼마나 많은가. 심지어 같은 단지 안에서도 출입구를 다르게 만들고 ‘임대주민은 놀이터 이용금지’라는 팻말을 박아두기도 한다. 우리와 너희는 근본이 다르다는 강력한 입장표명이 아니겠는가. 장애인 관련 시설은 절대 안 된다면서 악을 쓰는 것도 모자라 그걸 ‘개인의 권리’라고 포장하는 우리는 누구였던가. 나와 너는 비장애인과 장애인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결코 함께할 수 없는 존재임을 한 치의 부끄러움도 없이 천명하는 이들에게 이웃의 의미는 무엇이었을까. 

내가 싫어하는 저들을 어떻게든 솎아내고는 싶은데, 차마 ‘싫다’라고 대놓고 말하긴 눈치가 보일 때 이웃이란 용어를 끌어들여 적절히 사용하면 일사천리로 다음 단계가 진행된다. 우리가 위협을 받는다는 왜곡된 신호를 보내면, 적들의 공격으로부터 방어하는 건 당연하다는 논리 속에 혐오는 쉽게 은폐된다. 우리가 강조되면 ‘우리끼리’ 뭉쳐 저쪽을, 저쪽 사람을 배제하는 걸 정의롭게 여길 가능성도 높아진다. 우리(we)만 속한 우리(cage)를 더 촘촘하게 만들 때, 모두가 이웃인데 사랑하자는 말은 공허해지고 ‘누가 이웃이래?’, ‘저 인간이 왜 내 이웃이야?’라는 폭력적인 감별 작업은 뚜렷해진다. 

우연히 한 기사와 마주했다. 흉악범에 대한 이야기로 시작해 가석방 없는 종신형을 한국 사회도 검토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사형제 존치를 따질 때 등장하는 철학적 질문이 필요한 것도 아니니 찬반을 떠나 충분히 따져볼 수 있는 주제다. 하지만 기사의 제목과 내용에는 꼭 이런 추임새가 등장한다. “흉악범 아무개가 다시 내 이웃이 된다면.”
교화가 불가능한 흉악범도 있음을 말하는 거야 알겠는데, 사이코패스 언급할 때만 이웃이 운운되는 게 아니다. ‘내 이웃이 된다면’ 식의 표현은 그 앞의 등장인물을 변형시키며 광범위한 배제와 혐오를 정당화하는 연료로 사용된다. 특히 더 낯선 대상일수록 ‘이웃’은 더 강력하게 결집해 더 강하게 상대를 밀어낸다. 이를테면, 난민 논란이 있을 때마다 등장하는 특정 종교와 특정 인종을 향한 엄청난 폭력성 안에는 ‘같은 한국 사람끼리 뭉치는 건 당연하다’는 그릇된 윤리의식이 깔려 있다. 이 틈을 비집고 들어가 어떤 식이든 논쟁을 한들, 결론은 ‘한국인들과 그들은 어울릴 수가 없다’는 게 전부일 뿐이다. 이웃을 사랑해야 된다면, 일단 이웃부터 안 만들면 되는 것 아니냐는 자세다.

결국엔 세상 모든 사람이 다 연결돼 있다는 교훈을 지닌 “이웃을 사랑하라”는 성서 구절은, 나하고 죽이 맞는 사람들하고만 이웃을 유지하고 살아가기란 불가능하다는 걸 분명히 알려준다. 누군지 살펴보고, 내게 도움이 되는지 따져보고 사랑하라는 게 아니라, 누구라도 혐오하지 말라는 거다. 하지만 한국 사회에서 이웃 개념은 처음에 ‘연결된’ 사람들끼리의 이해관계를 최우선으로 공동체를 결속시키는 힘을 지니고 있다. 그릇된 이웃 사랑의 크기만큼 한쪽이 다른 한쪽을 바라보는 편견의 크기도 더 커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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