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을 졸업하고 취업의 꿈을 펼치던 취준생.
힘차게 사회에 첫발을 내딛으려던 찰나, 도약대를 밟기도 전에 수렁에 빠졌다. 우울증과 대인기피증으로 하루하루를 보내며 자신감을 잃어가던 그때,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달려간 그에게 ‘치유’와 ‘나눔’의 즐거움이 파랑새처럼 날아들었다.
꿈꾸는 소녀들의 고전 『빨강머리 앤』에는 이런 대사가 등장한다. “이제부터 발견할 일이 잔뜩 있다는 건 멋진 일이에요. 뭐든 미리 다 알고 있다면 시시할 테니까요. 상상할 거리가 없어지잖아요?”
누구나 인생에 시련을 겪지만 극복하는 법은 저마다 다르다. 빨강머리 앤처럼 상상력에 기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남다른 행동으로 돌파구를 찾는 사람도 있다. ‘러닝전도사’ 안정은 런더풀 대표의 선택은 달리기였다.
“컴퓨터 공학을 전공하고 한동안 개발자로 일했어요. 하지만 적성에 너무 안 맞아서 회사에 다니는 내내 너무나 힘든 시기를 보냈죠. 이후 항공사 승무원이 되기 위해 열심히 준비해 중국 항공사에 합격했는데 하필 사드 사태가 터졌어요. 제가 200번째 비자 신청자였는데 딱 199번까지만 발급하고 대사관 문이 닫히고 말았어요.”
셀프 치유에서 비롯된 러닝을 세상에 전도하다
취업을 위해 매일같이 노력하고 기도하던 안정은 대표는 취업의 문턱에서 불운을 맛봐야 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좌절을 겪은 그는 1년 동안 방문을 걸어 잠근 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고민의 늪에 빠져 헤어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우연히 집 밖을 나왔을 때 대인기피증에 시달리던 그는 사람들을 피해 도망치듯 달리기 시작했고 전에는 몰랐던 새로운 감정을 체험하게 된다.
“스물다섯 살 때 은둔형 외톨이처럼 살다가 처음으로 ‘달리기’라는 걸 해봤어요. 5분 정도 뛰었더니 몸과 마음이 가벼워지는 신기한 경험을 할 수 있었죠. 우울증 때문에 평소 잠도 잘 못 잤는데 그날따라 잠도 잘 오고 마음도 편해졌어요. 그때부터 인생이 달라지기 시작했죠.”
달리기로 슬럼프를 극복한 그는 그 이후에도 달리고 또 달렸다. 호텔에서 마케팅 일을 하면서도 한강에서 20km씩 달리기를 즐기며 스트레스를 훌훌 털어버리는 자기만의 치유법을 터득했다. 그렇게 달리기를 시작한 지 6개월 만에 마라톤 풀코스를 완주하게 됐다. 더 이상 취업 때문에 고민하지 않는, 나 자신을 찾아가는 새로운 삶을 살 수 있었다.
“달리면서 눈물을 흘린 적도 참 많아요. 마라톤하면서 운다는 게 상상이 안 되잖아요. 마라톤 행사에서 우연히 만난 어느 40대 남성분으로부터 자기도 울면서 달리기를 시작했고 그때부터 가슴이 뻥 뚫리게 됐다는 말을 듣게 됐어요. 저만 힘들었던 게 아니라 많은 사람이 고통을 치유하기 위해 달린다는 것을 알게 됐어요.”
그는 힘들어하는 많은 사람과 함께 달리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달리기를 통해 모든 고민과 콤플렉스를 훌훌 털어낼 수 있는 러닝 동호회를 머릿속에 그렸다. 이름도 발랄하게 ‘탑걸즈’. 남의 시선에 개의치 않고 레깅스와 크롭탑을 입고 있는 그대로의 나를 자신 있게 보여 준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
“사람들은 종일 힘들게 일한 후 축 늘어진 어깨로 지하철을 타고 집에 와 TV를 보다가 하루를 마감해요. 하지만 달릴 때만큼은 내 숨소리를 느끼며 내가 가고 싶은 대로 발을 내딛고 나아가게 되니까 오직 나에게만 집중할 수 있지요. 그래서 달리기는 좋은 치유가 되는 것 같아요.”
달리기를 통해 자신감을 얻은 그는 내친김에 달리는 직업을 갖기로 결심했다. 다니던 대기업을 그만두고 마라톤은 물론 철인3종, 27시간 동안 한라산 111km를 오르는 울트라 트레일러닝 등 달리기 좀 한다는 이들이 모이는 대회를 빠짐없이 섭렵했다. 그리고 달리기에 관한 칼럼을 기고하거나 미디어에 출연해 러닝 문화를 알리면서 본격적인 러닝전도사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그렇게 세간의 이목을 끌게 된 그가 홍보대사나 모델을 맡은 대회만 수십 가지. 손기정평화마라톤, 경기국제하프마라톤, 서울국제마라톤, 군산새만금국제마라톤, 인천송도국제마라톤 등 각종 대회와 스포츠브랜드, 화장품, 자동차, 금융 광고의 모델로 활동하며 ‘러닝계의 셀럽’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달리는 ‘러너’에서 치유하는 ‘힐러’로
그는 달리기와 관련한 많은 행사를 기획하기 위해 3년 전 1인 기업 ‘런더풀’을 설립했다. 런더풀이라는 사명에는 런(Run)과 원더풀(Wonderful)의 의미처럼 달리기로 행복하고 아름다운 세상을 만들자는 의지가 담겨 있다. 런더풀의 주요 행사 중 하나는 런트립(Run Trip)으로, 달리기와 여행을 접목했다. 달리며 쓰레기를 줍는 플로깅 등의 활동과 여행이 결합돼 재미와 의미를 한꺼번에 잡은 안정은표 런트립은 러닝 동호인들 사이에서는 이미 유명한 행사다. 한편 안 대표가 2년 전부터 홍보대사로 활동하고 있는 인천송도국제마라톤 대회는 인천 소방본부에서 진행하는 기부 캠페인인 ‘119원의 기적’에 마라토너들의 참가비 중 일부를 기부받고 있다. 이를 통해 참가자들은 나눔활동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나눌수록 커지는 행복을 느껴요. 달릴수록 가뿐해지는 러닝과 닮았어요.”
글쓰기에 흥미를 느낀 그는 여러 권의 책을 펴내기도 했다. 한창 고민하고 있는 20대 청년들에게 자신의 경험을 들려주는 인생지침서인 『나는 오늘 모리셔스의 바닷가를 달린다』, 『오늘도 좋아하는 일을 하는 중이야』 등의 저서가 ‘달리기’를 통해 세상의 빛을 봤다. “마라톤을 하면서 느낀 건 울면서 뛰는 사람들 모두가 각자 인생의 주인공이라는 사실이에요. 달리기가 부담된다면 5분간 걷거나 노트북을 열어 오늘 이야기를 딱 한 줄씩 채워 보는 걸 권해 드려요. 여러분 모두가 인생의 주인공이 되는 그 즐거움을 느꼈으면 좋겠어요.”
한 달 전 수원화성 바로 옆에 베이커리를 열면서 찾아오는 사람 하나하나가 소중하고 아름답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는 러닝전도사. 아침 7시에 가게 문을 열고 자신을 찾아올 방문객을 위해 에그타르트를 만드는 그는 달리는 ‘러너’이자 사람들을 치유하는 ‘힐러’로 두 발을 단단히 땅에 딛고 있다. 인생은 결국 희망과 상상력을 무기로 치르는 기나긴 싸움이다. 달리기로 희망을 전하는 그가 무엇보다 명징한 증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