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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차별의 씨앗달리지 않으면 나태한가?
오찬호 『민낯들-잊고 또 잃는 사회의 뒷모습』 저자 2022년 08월호


어린 시절, 달리기를 정말 싫어했다. 부모님은 새벽마다 나를 집 근처 학교 운동장으로 보냈다. 그럴 이유가 있었겠지만 그걸 이해하기엔 난 어렸다. 추운 겨울날 마지못해 집 밖으로 나와 아무도 없는 학교에서 자판기 코코아를 마시며 시간을 때우던 처량한 내 모습이 가끔 떠오른다. 이런 생각을 어렴풋이 했다. 좋은 것인들 좋게 전달되는 건 아니라는 걸.

한때 달리기를 정말 좋아했다. 아파트 앞에 한강까지 이어지는 산책로가 기가 막혔다. 몇 년간 새벽마다 한 시간씩 달렸다. 상쾌했고 좋았다. 나는 부모님의 의중을 알게 됐을까? 아니다. 오히려 누군가에게 달리기 예찬론을 전파하는 데 신중했다. 그저 나 혼자 뿌듯해하는 것만으로도 달리기 효능은 주변에 적당히 전파됐다. 내 기분을 ‘너도 느끼라고’ 재촉할 순 없으니 말이다. 작가인지라 달리기를 키워드 삼아 나를 적당히 괜찮은 사람으로 포장하고픈 유혹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다. 달리기 좋아하는 사람은 착실하고 성실하고 인자하고 등등 바른 사람 그 자체라면서 지나치게 흥분하는 그런 글을 나는 쓰지 않았다. 

지난 3년간 난 달리지 못했다. 무릎과 발목이 선천적으로 성치 않다는 걸 아픈 다음에야 알았다. 다른 질환도 마찬가지겠지만 관절이 아프면 삶이 너무 괴롭다. 화장실에서 앉질 못하고 버스를 타는데 올라와야 하는 한쪽 다리가 땅에 붙어 움직이질 않는다. 그런데 병원마다 진단은 또 다르다. 답답함은 비슷한 아픔을 지닌 이들이 모인 인터넷 커뮤니티에서 조금 풀린다. 무슨 해법을 알아서가 아니라 그냥 나와 같은 처지로 힘들어하는 이들이 ‘많음을’ 알면서 위로도 받고, ‘그러니’ 겸손해야겠다고 다짐한다. 여러 시행착오를 거치며 일상을 버티는 수준까진 이르렀지만 여전히 달리지 못한다. 다시 아프면 끝장이라는 생각에 몸이 자동적으로 움츠러져 있다.  

달리지 못해서 가장 괴로운 건 나인데, ‘못 달린다는 건 핑계다’라는 식의 글을 마주하면 허탈하다. 당신이 달려야 하는 이유랍시고 전달되는 글에는 뾰족한 창들이 삐죽삐죽 튀어나와 있다. 최근에 마주한 달리기 찬양론도 마찬가지였다. 이런저런 잘 달리는 방법을 알려주다가 갑작스레 ‘무릎은 쉽게 망가지지 않는다!’라는 꾸중이 등장한다. 그리고 사람은 달리도록 만들어졌고, 사람은 달려서 병나는 존재가 아니라는 지나친 일반화가 이어지더니 못 달릴 만큼 아픈 몸을 내버려 둬서는 안 된다면서 못 달리는 사람들을 신체 방치자로 쉽게 둔갑시킨다. 항상 이런 식이다. 아픔이란 게 얼마나 복합적인지는 차치하고, 운동 찬양은 늘 누구를 기어코 나태하게 만들고 만다.

운동은 운동하는 이가 나태하지 않은 것임을 뜻하는 것이지 그 반대가 나태함을 증명하지 않는다. 여기서 나태하지 않다는 건 운동을 했냐 안 했냐 정도의 구분이고 그 덕에 본인이 성실히 일상을 살게 됐다고 주장하기 위한 설명이지 타자의 일상을 평판하는 증거물이 아니다. 물론 운동효과를 어떻게든 알리고 싶어 하는 이들의 들뜬 마음은 이해한다. 하지만 운동 때문에 정신이 맑아졌다는 간증이 운동을 안 하는 이들은 정신이 맑지 않다는 ‘맑지 않은’ 논리로 이어져서야 되겠는가. 운동이 만병통치약이라는 막무가내 논리만이 부유하면 아픈 사람은 늘 자기 탓부터 하게 된다. ‘몸을 방치하다 병에 걸렸네요’, ‘빈약한 근육 때문에 몸이 아프다’ 등의 자학적 추임새가 정말 병의 원인이 그것인지와 무관하게 떠돌아다니는 이유다. 

달리는 이들이여! 그냥 달려라! 행복하면, 그걸 얼굴에만 드러내라! 딱 거기까지만 해라. 그것만으로도 달리지 못한 사람들은 ‘다시 달리기를’ 희망한다. 제발, 못 달리는 건 다 핑계라는 티끌 같은 신호라도 보내지 마라. 아픈 사람 힘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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