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말 고종은 조선을 근대 국가 체제로 탈바꿈하고자 국명을 ‘대한(大韓)’으로 변경, 선포했다. 조선이 주변 제국들과 동등한 입장에서 정치·외교 문제를 해결하고 남의 지배나 간섭을 받지 않는 자주국가임을 천명하기 위해서였다.
최근에도 국명을 바꾼 나라가 있다. 한국인들에게도 익숙한 형제의 나라, 터키다. 지난 6월 유엔은 기존 ‘터키(Turkey)’라는 국명을 ‘튀르키예(Türkiye)’로 변경하는 것을 승인했는데 국명 변경의 배경에 대해 의견이 다양하다.
2014년 국가브랜드 전담 조직 및 지원 프로그램 신설
첫째, 국명에서 연상되는 이미지를 탈피하기 위해서라는 것이다. 영어 단어 ‘터키(turkey)’는 칠면조를 뜻한다. 국민 대다수가 이슬람교를 믿는 튀르키예에서는 기존 국명 터키가 추수감사절 식사와 기독교 문화를 연상시킨다는 부정적 여론이 있었다. 또한 ‘터키(turkey)’는 미국 속어로 어리석은 사람을 지칭하기도 해, 터키라는 국명의 어원으로 용감한 사람을 지칭하는 단어 ‘튀르크’와는 배치되는 부정적 이미지를 담고 있다.
둘째, 정치적 배경이 있다는 것이다. 에르도안 튀르키예 대통령은 2003년 이후 19년간 총리 등을 거쳐 지도자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최근 급격한 인플레이션과 자국 통화가치 하락 등으로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이 확대됐고, 체감 경기가 하락함에 따라 정권교체 여론도 등장하고 있다. 이에 주요 외신은 내년 6월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집권당 정의개발당(AKP)이 민족주의 성향 유권자들의 표를 확보하기 위해 국명 변경을 추진한 것으로 분석했다.
실제로 에르도안 대통령은 이슬람주의와 민족주의를 앞세워 적극적인 주권 행사를 하고 있다. 2020년 7월 유네스코 유산인 아야 소피아 박물관을 이슬람 사원인 모스크로 전환하는 법령을 발표한 것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다. 과거 튀르키예 공화국을 설립한 아타튀르크 전 대통령이 이슬람식의 술탄제를 폐지하고 서구화를 꾀한 것과는 반대되는 행보다.
그러나 정치적·문화적 배경 외에도 중요한 이유가 있다. 바로 새로운 국가브랜드 창출이다. 국가브랜드는 한 국가의 정치·문화·경제 등 다양한 요소로 형성된 상징체계로 글로벌시장에서 차별적 경쟁우위를 점하는 데 중요한 요소다. 정치적 차원에서 강력한 국가브랜드를 구축하면 국가의 대외적 위상이 높아지고 외국과의 교류가 원활해진다. 또한 경제적 차원에서 우수한 국가브랜드는 자국 제품의 경쟁력을 높이고 기업 및 제품의 브랜드 가치를 향상시킨다. 영국, 독일 등 선진국을 포함한 많은 국가가 국가브랜드에 관심을 갖고 중장기 전략을 추진하는 이유다.
지난 5월 차우쇼을루 외무부 장관은 국명 변경을 끝으로 대통령 주도하에 진행된 국가브랜드 강화 사업이 마무리될 것이라고 밝힌 바 있다. 튀르키예의 국명 변경이 국가브랜드 전략의 일환으로 추진됐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과거 튀르키예의 국가브랜드 전략은 외국인 관광객 유치에 집중됐다. “리듬에 맞춰 터키를 즐기세요(Go with the Rhythm, Enjoy Turkey)”, “터키는 당신을 환영합니다(Turkey Welcomes You)” 등이 그 당시 나온 슬로건이다. 그러다 정부는 2014년 관광수출업자협회(TMI) 산하에 국가브랜드 강화 전담조직을 신설하고, “터키, 잠재력을 발견하라(Turkey, Discover the Potential)”라는 홍보 슬로건을 발표했다. 국영 방송사는 특정 시간대에 의무적으로 홍보 영상을 방영하며 자국민들의 공감대를 확보했고, 대외 홍보 캠페인도 병행했다. 홍보 영상에는 튀르키예가 추구하는 세 가지 국가브랜드 핵심 가치(역사, 기술, 기회)가 담겨 있다. 영상 앞부분에는 메소포타미아, 오스만 제국, 실크로드의 일부로 1만 년 이상 인류 문명의 터전이자 다양한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튀르키예의 역사적 장소들이 소개된다. 이어 자동차, 가전제품 등 제조업 현장의 모습이 나오며 기술력을 보유한 자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으라는 메시지가 등장한다. 동서양을 잇는 지정학적 위치와 역사적인 배경을 강조하며 현재도 무역과 투자 등에 최적화된, 매력적인 국가임을 어필하고자 한 것이다.
국가브랜드 강화를 위한 경제·산업 분야의 노력도 있었다. 2014년 정부는 국가 지원 브랜딩 프로그램 투르퀄리티(TURQUALITY)를 만들고 “10년 안에 글로벌 브랜드 10개를 만든다”는 비전을 내세웠다. 브랜드 잠재력을 가진 자국 기업을 대상으로 단순한 금융 지원 외에 컨설팅 서비스 등을 제공함으로써 글로벌시장에서 고품질의 브랜드 이미지를 구축하려 했다. 초기에는 프로그램 대상이 섬유 및 의류(기성복) 산업에 국한됐으나 이후 각종 소비재, 보석류로부터 자동차, 산업기계 등 제조업 일반에 이르기까지 산업 전반으로 확대돼 74개 브랜드, 372개 기업을 지원했다. 알첼릭(Arcelik), 베스텔(Vestel) 등 유럽시장에서 브랜드 인지도가 높은 가전업체들과 마비(Mavi), 코튼(Koton) 등 동유럽 및 중동 지역 시장에서 성장하고 있는 의류업체들이 대표적인 성공사례다.
국가브랜드 순위, 아프리카 등과의 우호적 관계와
긍정적 국가이미지에 힘입어 20위권 내로 반등할 듯
튀르키예는 2021년 기준 국가브랜드 32위를 기록했다. 과거 대비 10단계 이상 하락한 순위다. 최근 몇 년간 환율 변동성 확대에 따른 기업가치 하락과 미국·EU 등 서방국과의 외교적 마찰로 인한 리스크 확대가 주요인이다. 그러나 거시경제의 불확실성이 해소된다는 전제하에 20위권 이내로 반등할 가능성은 높다. 그 원동력은 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 국가들과의 우호적 관계와 긍정적 국가이미지에 있다.
세속주의를 표방한 튀르키예는 중동 지역에서 영향력을 행사하기에는 상대적으로 제한이 있었다. 그에 비해 아제르바이잔 등 중앙아시아 국가와는 공통의 언어, 인종, 역사 및 문화적 연대를 바탕으로, 아프리카와는 지리적 인접성 및 새로운 무역시장 개척의 필요성 속에서 오랫동안 교류를 이어왔다. 튀르키예 개발협력조정청(TIKA) 발표 자료에 따르면 2010년대에는 공적개발원조(ODA) 사업 예산(시리아 관련 사업비 제외)의 30%가 각각 아프리카와 중앙·남아시아 지역에 배분될 만큼 많은 투자와 지원이 이뤄졌다. 특히 아프리카 국가들과는 대외 원조 등 호혜적·인도적 차원의 정책과 더불어 양국 간 인적 네트워크 형성을 통해 경쟁력 있는 국가브랜드를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필자가 만나본 튀르키예의 한 조선업체는 자국의 국가브랜드를 활용해 한국 업체와 제3국에 공동 진출하는 방안을 제안한 바 있다. 이 기업은 투르크메니스탄 등 중앙아시아 지역에 군함을 수출한 경험이 있고, 최근에는 자사가 획득한 아프리카 프로젝트 비공개 입찰권을 활용해 공동으로 수주에 참여할 한국 업체를 찾고 있었다. 중앙아시아 및 아프리카 시장에서 긍정적으로 인정받는 튀르키예의 국가브랜드가 실제 기업 간 경제적 협력으로 이어지고 있음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내년은 튀르키예 공화국이 설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뜻깊은 해다. 튀르키예 정부는 주변 국가들과 경제적 협력을 확대하고 안보협력을 강화해 지역의 안정성을 높이고 국제사회에서 주요 조정자로서의 위상을 제고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가시적인 성과도 있었으나 최근 불안정한 거시경제 상황으로 여러 성과가 희석되는 모습이 나타나고 있다. 이번 국명 변경이 국가브랜드 전략의 마무리 작업이 아닌, 체계적이고 지속적으로 국가브랜드 지평을 넓혀 가는 작업의 초석이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