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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글로벌 비즈니스 리포트벌레의 눈으로 본 혁신
김욱진 KOTRA 미국 실리콘밸리무역관 차장 2022년 09월호


반환점을 돈다. 주기적으로 국외 근무를 하는 직업인으로서 늘 어디쯤 왔나를 확인한다. 가장 쉬운 방법은 임기가 얼마나 남았는지 떠올리는 것이다. 지난해 초, 난생 처음으로 아메리카 대륙을 밟았다. 살면서 꽤 많이 외국을 다녔다고 자부하지만 이상하게 미국에 올 기회는 없었다. 게다가 미국과 대립각을 세우는 이란에서 5년을 머무른 탓에 나는 사뭇 비장했다. 목적지는 실리콘밸리, 근무기간은 3년. 샌프란시스코로 향하는 비행기에서 나는 나 자신에게 던지는 출사표를 써 내려갔다. “사명감을 안고 간다. 개인의 성장, 가족의 행복, 국가에 대한 공헌, 세계시민으로서 전 지구적 기여까지… 나의 1분 1초가 가질 의미를 가슴에 새긴다.”

1년 반이 지나고 돌이켜 보니 부끄럽다. 갈 길이 먼데 시간은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고개를 들어보니 이미 반환점을 돌고 있다. 뭐라도 정리를 해야겠다고 다짐한다. 건축물 설계도로 치면 조감도(鳥瞰圖)만 그리려 애쓸 게 아니라 앙시도(仰視圖)라도 확보해야 하는 시점이다. 조감도가 새의 눈(bird’s eye)으로 위에서 내려다본 그림이라면 앙시도는 벌레의 눈(worm’s eye)으로 위를 올려다본 도면이다. 새의 눈은 거시적인 만큼 시원할 것이다. 벌레의 눈은 미시적이지만 솔직한 맛이 있다. 양쪽 모두 가치가 있다. 그동안 실리콘밸리의 혁신을 통시적으로 분석하는 거대담론은 한국에도 많았다. 하지만 실리콘밸리가 상징하는 혁신가의 정신과 지향점을 주체적으로 소화하려는 접근법은 아직도 찾기 힘들다. 실리콘밸리 근무 반환점을 돌며 벌레의 눈으로 바라본 혁신을 소개한다.

 

앞을 바라보며 철저히 안을 살펴본 슐츠,
스타벅스 창업자들이 보지 못한 미래가치 내다봐

 
미국에 오고 나서 가장 공들인 일은 하루를 시작하는 강력한 루틴을 만드는 것이었다. 실리콘밸리에서도 아침을 여는 나만의 의식(ritual)이 필요했다. 3년을 근무한다고 하지만 세분화해서 생각하면 1,095일 묵고 갈 뿐이다. 매일 떠오르는 태양처럼 1,095번 나를 새롭게 할 수 있다면 자기혁신에 성공할 것으로 확신했다. 아침형 인간으로서 새벽 시간을 고요하지만 의미 있게 보낼 수 있는 장소부터 물색했다. 오전 대여섯 시부터 커피나 차를 마시며 이런저런 글을 쓸 수 있는 작업실이 필요했다. 집에서 걸어갈 수 있어야 하고 여행을 가서도 비슷한 곳을 손쉽게 찾을 수 있어야 했다. 몇 군데 카페를 돌면서 실험했지만 결론은 스타벅스였다. 스타벅스만큼 언제, 어디서든 일관된 분위기를 조성할 수 있는 공간은 없었다. 나는 출근도장 찍듯 눈을 뜨면 집 근처 스타벅스로 향한다.

지금의 스타벅스를 만든 사람은 하워드 슐츠다. 그는 스타벅스를 대표하는 인물이지만 창업자가 아니다. 스타벅스는 1971년 젊은이 3명이 의기투합하며 탄생했다. 제리 볼드윈, 지브 시글, 고든 보커는 샌프란시스코에서 대학을 졸업하고 시애틀로 돌아간다. 이들은 대학 시절에 즐겨 찾던 커피숍 ‘피츠(Peet’s)’의 맛을 잊지 못해 시애틀에 가서도 원두를 우편으로 주문해 커피를 내려 마셨다. 샌프란시스코에서 시애틀까지 원두가 배송되는 과정에서 향과 맛이 떨어지기 일쑤였다. 세 명의 청년은 피츠를 모델로 삼아 커피원두를 파는 가게를 직접 연다. 이처럼 초창기 스타벅스는 커피원두 소매점이었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가 설립된 지 10년도 더 지난 1982년에 합류한다. 뉴욕 브루클린 노동자 가정 출신인 그는 스타벅스에서 실현하고 싶은 자신의 이상을 창업자들에게 설파한다. 스타벅스는 시애틀에서 커피원두를 파는 소매점 몇 개에 그칠 게 아니라 미국 전역, 나아가 세계 곳곳에 존재하는 문화공간이 돼야 한다는 것이었다. 창업자들은 슐츠의 비전에 반대했다. 그들은 피츠로 대표되는 커피의 정통성에 집착했다. 한 걸음 더 나아가 피츠커피를 인수하며 1987년 8월 스타벅스를 슐츠에게 파는 결정까지 내린다. 당시 하워드 슐츠가 스타벅스를 매입해 최고경영자가 되지 않았다면 나는 지금 스타벅스 노스산호세 지점에서 이 글을 쓰고 있지 못할 것이다. 스타벅스는 아직도 시애틀의 원두 판매점에 머물렀을지 모를 일이다. 무엇이 창업자들과 슐츠의 차이를 만들었을까.

슐츠의 스타벅스는 전 세계를 대표하는 압도적 커피 브랜드로 우뚝 섰다. 하워드 슐츠는 스타벅스를 인수하고 딱 10년이 지난 시점에서 성장기를 담은 책을 낸다. 우리말로는 『스타벅스, 커피 한 잔에 담긴 성공신화』로 번역됐지만 원제는 『당신의 심장을 부어라(Pour Your Heart Into It)』다. 슐츠가 스타벅스의 대표로서 초창기 가장 공들인 일은 ‘커피 경험의 재창조’였다. 하워드 슐츠는 언제나 앞을 바라봤다. 일부 고급 지식인의 전유물로 인식되던 원두커피 문화를 미국 전역으로 전파할 수 있다는 담대한 마음을 가슴에 품었다. 그는 앞으로 커피숍이 보다 많은 이들이 소박한 여유를 즐기며 교류하고 낭만을 느끼는 오아시스가 될 것으로 확신했다. 반면 제리 볼드윈을 비롯한 창업자 3명은 옛날에 사로잡혀 있었다. 그들은 샌프란시스코대를 다니던 시절 즐긴 피츠커피의 맛과 경험을 잊지 못하며 계속 뒤를 돌아봤다. 미래로 나아가려는 이와 과거로 회귀하려는 자가 있다. 혁신가는 누구일까. 당연히 전자다.

하워드 슐츠는 철저히 안을 살폈다. 자신이 몸담은 조직인 스타벅스 속에서 기회를 발굴하고 가능성을 키웠다. 창업자들이 밖으로 눈을 돌리며 피츠커피를 인수하는 일에 공들일 때, 슐츠는 스타벅스에서 실현할 자신의 사명을 잊지 않았다. 슐츠는 비전을 이렇게 정의했다. “당신이 보는 것을 다른 이가 보지 못할 때, 사람들은 그걸 비전이라 부른다”라고 말이다. 슐츠는 스타벅스의 내부자로서 창업자들이 보지 못한 미래가치를 내다봤다. 확신이 없던 창업자들은 피츠커피의 정통성에 의지해 외부에서 답을 구하려 애썼지만 성공적이지 못했다. 하워드 슐츠는 “기업을 계속 키우려면 자기 자신부터 개혁해야 한다”라고 말한다. 난관을 맞거나 선택의 기로에 섰을 때 우리는 주로 밖에서 길을 찾으려 시도한다. 나의 결정을 남에게 위탁하는 방식은 쉽고 편하다. 하지만 하워드 슐츠의 스타벅스가 증명하듯이 해결의 실마리는 언제나 내 안에 있다.

 

경신이 아닌 갱신

실리콘밸리 근무 1년 반이 지났다. 생애 처음 미국 땅을 밟은 날은 2021년 1월 28일이다. 이국의 분초를 아껴 쓰겠다고 다짐하며 나는 흘러가는 시간을 축적하기 시작했다. 도착하자마자 휴대전화에 날짜계산기 앱부터 깔았다. 내 스마트폰의 숫자는 지금 547을 가리키고 있다. 547일이 지났고 547일이 남았다. 547번 아침에 눈을 떴고 547번 저녁에 눈을 감았다. 눈뜨고 있는 동안만큼은 늘 혁신을 고찰하려 노력했다. 반환점을 돌며 중간 정리한 혁신의 토대는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갱신(更新)’하는 자세다. 혁신가는 매일 자기갱신에 성공하는 사람들이다. 한자는 같지만 ‘경신(更新)’이 남을 뛰어넘는 상대적 개념이라면 ‘갱신’은 나를 새롭게 하는 절대적 잣대가 기준이 된다. “홈런을 치면서도 자기갱신을 추구하라(Seek to renew yourself even when you’re hitting home runs)”는 하워드 슐츠의 말을 떠올리며 오늘도 나를 새롭게 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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