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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글로벌 비즈니스 리포트네덜란드에서 배우는 물과 잘 지내는 법
이혜수 KOTRA 네덜란드 암스테르담무역관 과장 2022년 10월호

네덜란드에는 한스 브링커라는 소년이 밤새 손가락 하나로 무너지는 제방을 막아 마을을 지켰다는 전설이 있다. 언뜻 과장된 이야기 같지만 네덜란드 사람들이 ‘물’과 싸워온 시간을 생각하면 전혀 근거 없는 이야기도 아니다. 사실 ‘낮은 땅’을 의미하는 나라 이름에서부터, 하늘과 맞닿은 평평한 땅, 그 위를 달리는 자전거, 땅에서 물을 퍼내던 풍차, 비옥한 개간지에서 자라는 튤립과 질척한 흙에 적합했던 나막신, 오늘날 물류중심지로서의 위상까지 네덜란드를 대표하는 생활모습들은 알고 보면 모두 물과 싸워온 네덜란드인들의 역사에서 비롯된 것들이다.

지난해 여름은 이런 네덜란드의 저력이 확인된 때였다. 네덜란드 남부 국경지역에서 발생한 큰 홍수로 이웃한 독일과 벨기에에는 230명이 넘는 사망자가 발생하는 등 큰 피해가 있었던 반면 네덜란드에는 사망자가 한 명도 없었기 때문이다. 네덜란드는 국토의 60%가 해수면 아래에 있고, 북해를 비롯해 라인강, 마스강, 엠스강 등 유럽 주요 강이 교차하고 있는 대륙 서단 삼각주지역에 위치해 있다. 주어진 자연환경 조건만 보면 홍수에 매우 취약할 것 같은데 주변국보다 피해가 적었다니 매우 놀라운 일이다.

오랫동안 물과 싸워온 네덜란드의 치열한 역사로 ‘신은 세상을 만들었지만 네덜란드는 네덜란드인이 만들었다’는 말이 있을 정도다. 얼마 전 겪은 우리나라 수도권의 홍수 피해를 계기로 네덜란드의 경험에서 배울 점이 무엇인지 다시 한번 조명해 보고자 한다.

1953년 대홍수 계기로 도입한 ‘델타플랜’ 통해
예방 중심의 촘촘한 홍수 위험관리 시스템 구축


네덜란드라고 아픈 기억이 없을 리 없다. 1953년 1월 네덜란드 남부지방에 갑작스레 찾아온 해일과 폭풍으로 1,836명이 목숨을 잃고 7만 명의 대규모 이재민이 발생했다. 네덜란드의 자연환경, 즉 삼각주에서 이름을 따온 홍수 대응정책인 ‘델타플랜’은 이때부터 시작됐다. 정부는 당시 가장 큰 문제로 지적됐던 낮고 허술했던 제방을 높이고 해안관리에 대한 기본적인 합의를 마련해 나갔다. 1953년 시작된 건설 프로젝트는 댐 6개, 해일방벽 5개를 지어 해안선 길이를 700km가량 줄이고 1997년에야 마무리됐다.

프로젝트가 마무리된 후에도 적정 제방 높이는 법에 따라 매년 재검토되고 있다. 이제는 해수면 상승, 토양 침식, 잦고 강해지는 폭우, 건조해지는 기후 등 변화하는 환경 속에서, 2050년까지 극한 기상상황에 맞서 홍수 위험을 관리해 담수를 확보하고 수자원을 복원한다는 목표를 두고 있다. 네덜란드 정부의 이러한 지속적인 노력이 없었다면 국토의 60%가 정기적으로 침수 피해를 입었을 것이라고 한다. 특히 해당 지역은 총인구 1,700만 명 중 절반이 넘는 900만 명이 밀집돼 있고, GDP의 70%를 담당하고 있는 주요 경제지역이기도 하다.

네덜란드의 정책은 기본적으로 홍수 ‘대응’보다 홍수 ‘예방’에 집중하고 있다. 따라서 홍수 가능성보다는 홍수의 잠재적 영향을 기준으로 한 ‘위험기반 접근법’을 활용한다. 홍수 대비를 위한 기준도 매우 높다. 인구밀도가 상대적으로 높은 서부지역은 1만 년에 한 번, 인구밀도가 낮은 곳은 4천 년에 한 번씩 발생할 가능성이 있는 홍수로부터도 안전을 담보할 수 있도록 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 같은 접근을 통해 보다 필요한 곳에 효율적인 투자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한다.

이러한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네덜란드는 1,300km에 달하는 제방, 500여 개의 수문 그리고 펌프 시스템을 개선하고 있다. 홍수 예방을 위해서는 제방, 사구, 해일장벽을 개선하고 강을 넓히는 것이 주요 방안이다. 자연조건과 시간의 변화에 따라 달라지는 모래 양을 예측해 해안지역을 보존·보강하는 일도 계획돼 있다.
중앙정부는 수도위원회, 광역자치단체, 지역안전관리 조직과 홍수 임박 시 필요한 대응방안을 공유한다. 또한 네덜란드는 ‘더치 다이아몬드식 접근법’이라고도 불리는 훌륭한 민관 파트너십으로도 유명한데, 협력이 우선시되는 분야에서 정부, 민간, 시민사회, 연구기관이 같은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자금, 위험, 책임을 분담하고 있다. 이런 분야에는 해수면 상승과 홍수에 대한 대비도 당연히 포함되며 정부, 연구기관, 기업 간 관련 연구와 협업이 활발하다.

이렇게 전 국토를 대상으로 홍수 가능성을 점검해 대응수위별로 쌓아둔 제방을 표시한 지도를 보면, 제방이 실로 국토 전체를 에워싸고 있어 국경을 그대로 보고 있는 것 같다. 제방 축조 후에도 범람지역에 사는 사람들의 수, 지역의 경제적 가치, 변화된 잠재 위험성에 따라 보호장치가 추가된다. 그야말로 네덜란드 어디에 있건 홍수로부터 충분히 보호받을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진 것이다. 필자가 이곳 사람들에게 “땅이 해수면보다 낮은데 앞으로 닥쳐올 해수면 상승이 두렵지 않느냐”라고 물어보면 “네덜란드만큼 잘 대비하고 있는 나라가 없다”라고 웃으며 답하곤 하는데, 마냥 근거 없는 여유와 자신감이 아닌 것이다.

이러한 예방작업에도 불구하고 제방이 넘쳐 홍수가 발생할 경우에 대비해, 네덜란드는 피해와 사상자를 최소화할 수 있는 공간계획을 수립해 대피로를 마련하고 있다. 주민들은 우편번호만 알면 재난관리 웹사이트(overstroomik.nl)를 통해 바다나 강이 범람했을 때 예상되는 주소지별 피해정도와 대피방법을 미리 확인해 위기 대응에 참고할 수 있다. 학교에서도 남부지역의 제방과 댐을 중요한 견학장소로 삼아 홍수로 인한 위험과 대응책에 대한 관심을 높이고 있다.

기후변화 시대 주변국 간 협력 대응의 중요성 일깨워

유엔은 기후변화로 인한 기상이변이 향후 수십 년 동안 빈도와 심각성 측면에서 모두 증가할 것으로 예상하고 있다. 또한 국가별로 차이는 있겠지만 향후 기후재앙이 각 국가의 GDP에도 큰 영향을 끼칠 것으로 보고 있다. 지난해의 홍수 이후 네덜란드는 벨기에, 독일과 함께 기후변화로 증대되는 위험에 대응하고자 공동연구 조직을 신설했다. 이들은 국경 간 발생하는 자연재해에 대비한 비상 대응, 다층적 거버넌스 등에 대해 논의하고 있다. 최근 연구에 따르면 언론보도를 비롯한 정보 격차와 국경 간 조정 부족이 피해를 키운 측면도 있었다고 한다. 한국도 기후변화 대응에 인근 국가들과의 협력이 중요함을 환기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유럽과 한국을 비롯해 최근 선진 경제국들을 휩쓸고 있는 홍수는 더 이상 경제적 번영이 기후변화에 맞서 안전을 보장해 줄 수 없음을 단적으로 보여줬다. 모델링, 기후변화 예측, 시나리오 개발, 조기경보 시스템 등을 점검할 뿐 아니라 정부와 국민이 함께 위험의 정보를 객관적으로 인식하고 이에 따른 장단기 대응방법을 논의해 갈 수 있도록 해야 할 것이다.

네덜란드인들은 국토를 스스로 일궈냈다는 호기로운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지만 자연 앞에서 결코 자만하지 않았다. 홍수에 취약할 수밖에 없는 저지대라는 조건을 심각하게 받아들이고 오랜 시간 적극적으로 대응해 온 것이 물로부터 안전한 지금의 네덜란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자산이 된 것이다. 한때 골칫거리인 거대한 늪지대로 여겨졌던 네덜란드가 지금은 홍수 대비가 가장 잘 돼 있는 국가로 손꼽히게 된 것처럼, 우리나라도 보다 적극적인 인식과 대비로 홍수에도 강한 나라로 거듭날 수 있길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