졸업한 학생에게서 메일이 도착했다. 오랜만에 간신히 한숨을 돌리고 쓴다는 서두에 마음이 애틋해졌다. ‘선생님, 사회인의 삶이란 이런 건가요?’ 그는 사회인이 된 후 끊임없이 일을 쳐내는 하루하루를 살고 있었다. 아마 대부분 현대인의 일상은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직업적으로 일이 많든 많지 않든, 세상의 속도는 빠르고 나를 기다려주지 않는다. 집안일, 관계, 미래에 대한 불안, 과거에 대한 회한, 나를 가만있지 못하게 하는 고민 등은 매번 수고롭고 힘들다. 정신을 차려보면 아침의 햇살도, 계절의 흐름도 저만치 지나가 있다. 한참 물속에서 헤엄치다가 겨우 잠시 고개를 들고 숨 쉬는 것 같은 기분이다. 그가 정말로 묻고 싶었던 말은 어쩌면 ‘이런 하루하루에 무슨 의미가 있을까?’였을지도 모른다.
철학자 니체는 니힐리즘(nihilism, 허무주의)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니체의 허무는 ‘이 세상에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거나 ‘어떤 가치나 의미도 없다’는 말이 아니다. 니체는 세계와 삶을 이해하기 위한 기준으로 보편적 진리를 찾아왔던 이전까지의 서양철학, 유럽 문명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니체에게 세계의 진실은 보편적인 진리가 아니라 끊임없이 움직이고 부딪히는 힘들의 변화무쌍함에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니체는 스스로 보편 진리라 주장했던 과거의 가치, 규범, 체제를 붙들거나 그 대체제를 고민하는 대신 나를 이끌어줄 기준이나 정답을 찾는 태도를 버리는 것이 진실한 삶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렇게 해야만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는 기준이나 방법은 무엇인가? 그것들은 나 스스로 바란 것이 아니라 다른 사람의 눈치를 보며 적당히 따랐던 것일 수도 있다. 혹은 내가 선택한 것이라 해도, 그때는 나를 살맛 나게 했지만 지금은 나를 소진시키는 낡은 그물이 됐을 수도 있다. 그렇게 나의 눈을 가리고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던 것을 전부 치웠을 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는 빈터일 수 있다. 바로 그 빈터에서부터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세워갈 수 있다. 니체에게 비어 있음, 사라짐, 없음은 곧 새로운 창조의 신호다. 니체의 니힐리즘은 존재와 가치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자유롭게 시작할 존재와 가치를 적극 긍정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니체’ 하면 떠오르는 ‘초인(Übermensch)’은 낡은 체제에 붙들리거나 억눌리는 대신 삶을 자유롭게 놀이하며 즐기는 사람이다. 니체는 이를 어린아이가 놀이하는 마음에 비유한다. 어린아이의 놀이는 칭얼거리다가도 시작되고, 투덕거리던 것이 놀이가 되기도 하며, 하나의 놀이에서 금세 다른 놀이로 확장되기도 한다. 이 과정이 놀이로 성립되는 것은, 그 순간 바로 그 활동에 흠뻑 빠져 충실하기 때문이다. 니체는 변화하는 것을 피하지 말고 피할 수 없는 순간에 충실하며 자신만의 삶을 창조하고 긍정하라고 말한다. 기쁨과 창조의 삶은 혼란도, 문제도 없는 삶과 동의어가 아니다. 오히려 다가올 무수한 위험과 상처에 나를 열어두는 것이다. 니체에게 나 자신으로 살며 그 삶을 긍정하는 것은 나의 모든 실패, 되돌릴 수 없는 상처마저도 끌어안은 채 살아가는 것이다. 이러한 경지가 운명애 혹은 숙명애로 번역되는 ‘아모르 파티(amor fati)’다.
과연 평범한 인간에게 이러한 태도가 가능할까? 매일 숨차게 사는 듯한 이 삶, 그다지 의미 없어 보이는 이 삶을 사랑할 수 있을까? 우리에게 중요한 것은 삶에 숙명처럼 따라붙는 모든 것을 사랑한다는 말이 아니라 ‘사랑’ 자체인 것 같다. 사랑은 본래 손안에 붙들어 소유하는 것이 아니다. 계속해서 아끼고 가까이하고 싶은 마음이어서 멈춤 없이 움직일 뿐이다. 우리는 지금 이 삶을 사랑하기 쉬워서, 잘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사는 것이 아니라 헤매고 고민하고 좌절하기도 하는 이 삶조차 사랑하려 하기에 계속 의미를 묻는 것이 아닐까? 살아 있는 한 나 자신의 삶과 의미를 만들어가는 움직임을 멈출 수 없기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