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의 문장들’ 코너에 글을 쓴 지 이제 5년 차가 되다 보니 매달 글을 찾아 읽고 피드백을 주는 분들이 조금씩 늘었는데(정말 소중하고 감사하다고 이 기회를 빌려 전하고 싶다) 지난달 소개한 『죽은 이들의 뼈 위로 쟁기를 끌어라』를 읽고 “모처럼 스릴 넘치는 소설을 읽나 싶었는데, 이건 스릴러의 외피를 입은 심오한 철학 소설이잖아요!”라는 항의(?)와 함께 AS 차원에서 진짜 재미있는 스릴러를 추천해 달라고 하는 분들이 있었다. 아니, 올가 토카르추크에게 어디까지 바라신 거예요! 이런 마음이 든 동시에 바로 생각했다. 그래, 그럴 땐 스티븐 킹이지!
예전에 한 출판계 사람에게 “스티븐 킹은 한국시장을 무시한다더라”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데(오해하지 말라. 여기서 ‘무시’는 얕보고 낮춰 본다는 의미가 아니라 별로 신경 쓰지 않는다는 의미다.) 그의 신작이 나왔다 하면 바로 베스트셀러가 되는 많은 나라에 비해 한국에서는 킹이 그다지 인기가 많지 않다(베르나르 베르베르가 스티븐 킹보다 인기가 많은 유일한 나라 아닐까). 스티븐 킹의 이름과 세계적인 명성을 모르는 사람은 없는데 정작 그의 책을 챙겨 읽거나 팬인 사람은 생각보다 만나기 어렵다. 사실 나도 그렇다. 2000년대 후반에서 2010년대 초반 한때 열심히 찾아 읽다가 언젠가부터 손에서 놓았다. 그렇다고 그 책들이 별로였던 것도 아닌데(오히려 그 반대로 밤을 설쳐가며 아주 재미있게 읽었고 킹은 정말 천재라고 생각했는데) 왜인지 그렇게 됐다.
그러던 내가 킹을 마지막으로 읽은 지 거의 10년이 흐른 지금, 킹의 소설들을 다시 찾아 읽고 있다. 그가 지난해 출간한 『빌리 서머스』를 읽고 크게 감동했기 때문이다. 세상에. 킹 아저씨, 아니 이제는 킹 할아버지, 여전히 이렇게까지 잘 쓰신다고요? 10년 만에 만난 그는 장르소설의 제왕답게 여전한 건 물론이고 문학적으로도 완전히 만개해 있었다. 지난해 노벨문학상 베팅사이트에서 킹이 4위에 오른 의외의 결과가 잠깐 화제가 된 적이 있었는데 결코 의외가 아니었다.
사실 킹은 이미 몇십 년 전부터 타인의 ‘다름’에 대한 인정, 약자에 대한 옹호, 보수적인 원칙주의나 근본주의의 경계 등에 대해 끊임없이 이야기하며 시대정신에 굉장히 부합하는 책들을 써왔는데, 『빌리 서머스』는 그 절정에 놓여 있는 책이다. 그는 이 책에서 현대를 살아가는 이들이 한 번씩 절실하게 고민해야 하는 동시대적인 문제들, 이를테면 아동학대, 성폭력, 이라크 전쟁의 참상, 사적 복수가 횡행할 수밖에 없는 사회적 시스템의 구멍 등을 폭넓고 날카롭게 그려냈고, 더 나아가 이런 문제들 앞에서 우리가 함께 나누면 좋을 연대의 모델까지 제시했다. 동시에 이 책은 지금 같은 혼돈의 세상에서 문학이란 무엇인가, 글쓰기라는 행위가 고통을 대면할 수 있는 용기를 주고 그 대면한 고통을 치유할 수 있게 만드는 이유는 무엇인가, 진실이란 무엇이고 글쓰기와 진실 사이에는 어떤 관계가 있는가에 대한, 위대한 노작가의 치열한 답이기도 하다.
그럴 수 있다는 거 알았어요? 모니터나 종이 앞에 앉아서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거? 영원히 유지되지는 않고 세상은 항상 원래대로 돌아가지만 그래도 그러기 전까지는 얼마나 근사한지 몰라요. 그게 제일 중요해요. 뭐든 내가 원하는 대로 할 수 있거든요. - 2권 p.418
정신없이 재미있으리라는 건 예상했지만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다층적인 고민과 ‘좋은 어른’이 되고 싶다는 의지를 이렇게 깊이 찔러 넣는 책일 줄은 몰랐다. 킹은 정말 ‘킹’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