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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스코틀랜드의 대자연 속 숨겨진 진가를 찾아서
김후영 『언젠가 한 번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저자 2023년 05월호


영국(United Kingdom)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 웨일스, 북아일랜드 네 개의 지역으로 이뤄져 있다. 그중에서도 문화, 역사, 언어, 종교에서 고유의 특성이 강한 곳이 스코틀랜드다. 고고한 역사와 황량한 대자연을 가진 스코틀랜드는 여행자에게 매력적인 나라다. 특히 서부·북부 지역은 호수와 고성이 많기로 유명하다. 그래서 이번 여행의 목적은 스코틀랜드의 대자연과 함께 곳곳에 숨은 고성을 찾아내는 것이다. 스코틀랜드의 숨겨진 진가를 찾기 위해 글래스고(Glasgow)에서부터 자동차를 타고 시골길을 누벼봤다.
 

인구 61만 명의 도시 글래스고는 스코틀랜드 경제의 중심지이자 문화·예술의 다양성을 지닌 곳이다. 기원전 55년 로마제국은 오늘날의 영국 땅에 들어와 12년 만에 이곳을 정복하고 속주인 브리타니아를 세웠다(브리타니아는 이후 450년간 존속했다). 글래스고는 당시 이 지역의 군사기점이었고 도시의 모양을 갖추게 된 것은 6세기, 기독교인들이 들어와 교회를 세우면서다. 18세기부터는 영국과 미국을 오가는 담배무역업이 성황을 이루면서 이 도시는 차츰 상업 중심지로 발전하게 된다. 제1, 2차 세계대전 기간에는 군수업과 조선업이 발달하면서 호황을 누리기도 했다.

글래스고 시내에는 글래스고 현대미술관(Glasgow Gallery of Modern Art)을 비롯해 글래스고 예술학교(Glasgow School of Art) 등 도시의 문화·예술을 주도하는 명소 몇 곳이 있다. 그 밖에도 이곳 출신의 성공한 자산가 윌리엄 버렐의 다양한 소장품을 전시해 놓은 버렐 컬렉션(Burrell Collection)도 둘러볼 만하다.

 

크고 작은 호수를 지나 찾은 작은 고성

글래스고 시내를 돌아본 뒤 본격적으로 스코틀랜드의 대자연을 보기 위해 자동차를 타고 글래스고에서 23km 떨어진 로크 로몬드(Loch Lomond)로 향했다. 로크는 ‘호수’라는 뜻의 게일어로, 스코틀랜드에서는 호수를 로크라고 부른다. 켈트족인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영어를 고유 언어로 쓰는 잉글랜드의 앵글로·색슨족과 달리 게일어를 썼다. 

면적 71km², 길이 36.4km에 달하는 로크 로몬드는 스코틀랜드 대자연의 청정함을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호수 주변에는 낮은 산등성이가 길게 늘어서 있는데 호숫가에는 한가롭게 소풍을 즐기는 가족들이 보였다. 글래스고에서 나들이를 온 모양이었다. 멀리 호수를 일주하는 작은 유람선도 볼 수 있었다. 스코틀랜드인들이 부러운 것은 어디를 가나 이처럼 크고 작은 호수가 펼쳐져 있고 그 주변에 다양한 편의시설이 갖춰져 있기 때문이다.

로크 로몬드에서 조금 벗어난 곳에는 킬천(Kilchurn)이라는 이름의 작은 고성이 자리 잡고 있었다. 킬천성은 옛 성의 자태가 유적으로 남은 곳이다. 주변의 적막한 자연공간과 더해져 낮인데도 다소 으스스한 광경을 연출했다. 로크 오(Awe)의 한 자락에 둥지를 튼 이 성은 15세기 중반 글레노키(Glenorchy) 지역의 캠벨 가문이 사용했던 곳이다. 150년간 킬천성 주변을 다스렸던 캠벨 가문이 다른 곳으로 이주하면서 킬천성은 1770년대부터 폐허로 남게 됐다고 한다.

킬천성에서 서쪽으로 20km를 더 달려 느지막한 저녁 시간, 항구도시 오반(Oban)에 도착했다. 이미 해가 저무는 시점이었기에 보랏빛 황혼의 장관을 볼 수 있었다. 항구 주변은 평화롭고 고요했다. 황혼으로 얼룩진 하늘과 검은 실루엣으로 변장한 선박들의 모습이 눈에 띄었다. 본모습은 숨긴 채 표면적인 자태만 드러내고 있는 보트들이 한데 모여 잔잔한 물살에 서로 몸을 부딪고 있었다. 오반은 인구가 8천 명에 불과한 작은 도시지만 여름철이면 인근 멀(Mull)섬과 케레라(Kerrera)섬으로 향하는 여행자들로 북적이는 곳이다. 항구 주변에는 여행자를 반기는 오래된 레스토랑과 펍이 즐비하다.

인간이 심어 놓은 고고한 표상

다음날 찾은 스토커(Stalker)성은 오반에서 북쪽으로 29km 거리다. 차로 30분 만에 도착했다. 오반에서 포트 윌리엄(Fort William)으로 이어진 A828번 도로에서 차창 너머로 성의 자태와 주변 호수인 로크 라이크(Laich)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멀리서 바라본 스토커성은 마치 아주 작은 섬 위에 홀로 외롭게 서 있는 미니어처 같았다.

스토커라는 이름은 사냥꾼이라는 뜻의 게일어 ‘스톨케어(Stalcaire)’에서 유래했다. 오늘날 스코틀랜드 서부 지방에서 가장 잘 보존된 중세 고성 중 하나로 꼽히는 스토커성은 1320년 맥도걸 가문이 지었지만 1388년경 소유권이 스코틀랜드의 스튜어트 왕조를 연 스튜어트 가문에게 넘어갔다. 이후 1620년, 제7대 스튜어트 족장이었던 던컨이 술에 취한 채 캠벨 가문과 한 내기에서 져 이 성을 캠벨 가문에 넘기는 일이 벌어졌다. 그러나 1840년경 성의 지붕이 파손되자 캠벨 가문은 성을 방치했고, 스튜어트 가문의 찰스 스튜어트가 성을 구입했다. 성은 현재 개인 소유지가 돼 특정한 날에만 일반에 공개되고 있다.

스코틀랜드 왕 제임스 4세가 스토커성에 자주 머물며 사냥을 즐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1503년 잉글랜드 헨리 7세의 딸과 결혼해 잉글랜드 왕가와 혈연관계를 맺은 최초의 스코틀랜드 왕이다. 또한 그는 유럽대륙의 르네상스 문화 운동을 받아들여 스코틀랜드의 문화 발전에 큰 공헌을 했다. 제임스 4세는 게일어를 사용한 마지막 왕이기도 하다. 그 후로 스코틀랜드 왕가에서는 영어를 공식어로 사용했다.

오반과 포트 윌리엄을 잇는 국도는 스코틀랜드 서부에서 가장 유명한 관광지인 글렌코(Glencoe)를 지나간다. 글렌코는 아오나크 두브, 베인 파다, 갸르 아오나크 세 개의 봉우리로 이뤄진 ‘세 자매 봉우리’로 유명하다. 글렌코 마을에서 세 자매 봉우리 방면으로 산책로와 가벼운 하이킹 코스가 있다. 하일랜드(스코틀랜드의 북쪽 지방)의 드라마틱한 풍광을 엿보고 싶다면 최소한 당일코스의 하이킹을 추천한다.

여행의 피날레는 에일린 도난(Eilean Donan)성이다. 우편엽서에도 종종 등장하는 이곳은 하일랜드의 대표적인 명소다. 이 지방의 드라마틱한 산세를 배경으로 고고한 자태를 뽐내고 있기 때문이다.
이곳에 성이 지어진 시기는 13세기 멕켄지 가문이 이 일대에 영향력을 키우던 때다. 멕켄지가가 스튜어트 왕가를 세우려는 반란에 연루되면서 18세기 정부(하노버 왕가) 군은 함대를 동원해 이 성을 파괴했다. 오늘날 성의 모습은 20세기에 복구된 것이다.

어둑해질 무렵 성의 자태는 보석이 반짝이는 것처럼 조명을 받아 화사한 자태를 뽐냈다. 킬천, 스토커, 에일린 도난. 세 고성을 둘러보면서 새로운 감회를 느낄 수 있었다. 바로 대자연 속에 인간이 심어 놓은 고고한 표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