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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시(詩)작내가 달의 아이였을 때
안희연 시인 2023년 06월호
(배누 일러스트 작가)

나는 시간과 마주 앉아 있었다. 그것은 색색의 털실 뭉치. 그중 하나를 골라 풀어내는 것이 내 일.
오늘따라 유난히 긴 털실을 집었다. 온종일 풀어도 끝이 없었다. 매듭이 너무 많아서 손이 아파요, 할아버지. 흘깃 이쪽을 바라보던 할아버지는 늘 신중해야 한다고 당부하셨다.
할아버지는 뭔가를 쪼개고 있었다. 아가야, 나는 이것을 작게 만들어야 한단다. 그리고 아주 깊숙한 곳에 감추어야 하지. 어디가 깊은 곳인데요? 얘야, 지척에. 흘러가버리는 순간순간에. 그것은 눈부시게 빛났지만 육안으로는 잘 보이지 않았다.
털실은 강물 같았다. 굽이굽이 흘러가는 모습은 아름다웠다. 보기에 좋아야 한단다 아가야, 허물 수 없다면 세계가 아니란다. 털실의 길이는 제각기 달랐지만 어떤 뭉치든 빛과 어둠의 총량은 같았다.
강둑에서 벽돌 하나를 빼내는 상상. 멀리서 큰물이 오고 있을 때. 실수였다고 미안하다고 말하는 상상을 자주 했다. 긁히고 찢긴 손을 달빛에 씻을 땐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렀고

하루 일과를 끝낸 뒤엔 그네를 탔다. 그곳에서 내려다본 지상에서 어둠을 향해 막 걸음마를 떼는 사람이 보였다.

『여름 언덕에서 배운 것』 중에서